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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30. 2024

천은사, 이내 빛에 젖은 물그림자

남도 여정 3


처음 이름은 감로사(甘露寺).

화엄사 쌍계사와 함께 지리산 3대 사찰의 하나로 노고단 아랫자락에 위치했다.

신라 흥덕왕 때 인도 승려가 창건한 고찰로 경내에 맑고 찬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임란의 와중 화재로 불타 중건할 당시 샘에 든 구렁이를 죽이자 샘물이 말라버려 샘이 숨었다며 천은사(泉隱寺)로 개명했다.  

이후 재화가 끊이지 않았다는데 조선조 명필인 이광사가 ‘지리산 천은사’라는 글씨를 물 흐르는 듯한 서체로 유려하게 써서 일주문 현판으로 걸었다.


그러자 그 뒤로는 재앙이 그쳤다는 바로 그 서체가 든 일주문이다.

고요한 새벽녘에 바로 여기 일주문에 귀 기울이면 현판 글씨에서 신운(神韻)의 물소리가 연연히 들린단다.

안 그래도 이내 빛 스민 적막한 산사, 머리 쭈뼛해지는 전설 따라 삼천리 같은 야담은 이만 접고.

그보다는 아름다운 수홍문(垂虹門)의 물그림자와 저녁 범종소리에 흠씬 취했던 순간들을 반추해보려 한다.

범종소리는 여타 절에서도 듣지만 무지개 모양 드리워진 수홍문이야말로 호수로 흘러내리는 계곡과 함께 운치로운 천은사만의 숨겨진 보물 같았다.

혹여 천은사 초입에서 수홍문 통과해 곧장 경내로 걸어가면 천은사의 진면목, 저 고운 자태를 놓치기 십상.

이층 누각인 수홍문은 하산길에 지나도록 하고 필히 계곡 쪽으로 직진해 한 오백 미터쯤 걸어야만 저 환상적인 미태 완상할 수 있으니 유념하길.

청량하게 흐르는 계류 가로지르는 무지개다리 위에 천은사 출입 문루로 세워진 수홍문은 피안교라고도 불린다는 말에 십분 공감이 된다.

천은사에 보물급 문화재가 다수 있다지만 무명의 보물은 수홍루 주변 반영이며 여기야말로 숨은 보석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그만큼 천은사는 수홍문이 베푸는 시혜 그 무형의 가치만으로도 존재 의미가 충분할 정도이니까.

일주문 지나 왼편 부도밭 감싼 금강송 군락지 품섶 사잇길도 고즈넉한 풍광이고, 샘천(泉) 자가 들었으니 사철 물 마를 것 같지 않은 계곡 물소리 또한 일품이긴 하다.


앞뜰에 있는 샘물을 마시면 정신이 맑아진다고 하길래, 손 정하게 씻고 손바닥 오므려 흐르는 물 세 번 받아 마셨다.

특히 이 절은 어마무시하게 번성해 으리번쩍대는 대찰이기보다 담백하니 소박한 분위기로 절집 다운 다소곳함이 남아있어 템플스테이라도 하며 정갈하게 머물고 싶은 사찰이다.


안온해서인지 범종각 옆 동백꽃 늦도록 고즈넉하게 피었고 화사한 산벚꽃 불경스레  흐드러졌다.

 
늘씬하게 긴 허리 하늘 높이 솟아오른 금강송 밀밀한 숲길 걸어보고 싶으나, 부도탑 어름에 스며든 어스름이 등을 떠민다.

초파일 즈음이면 천은사 일대에 건강한 신록 싱그러이 번질 것이다.

위치:전남 구례군 광의면 노고단로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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