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마다 머리를 싹싹 빗질하며 천 원의 행복을 거푸 느낀다.
그지없이 시원해 아아~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예전에 할머니가 참빗질을 하면서 아이구 시원하다, 하시던 표정이 요즘의 내 얼굴에 겹쳐진다.
죽제품인 참빗은 빗살이 가늘고 아주 촘촘한 빗이다.
일단 얼레빗으로 대강 빗은 머리카락을 고르게 다듬어주던 참빗.
동백기름 바르고 빗어넘기는 쪽 찐 머릿결을 정갈하고 매끈하게 정돈해주는 빗이자 육이오 이후 극성이던 머릿니 알인 서캐를 훑어내는 빗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요즘 사람들은 뭔 소리인가 할 이바구이겠지만.
암튼, 홈플러스에 갔다가 입구 쪽에 자리한 다이소에 들렀다.
빗을 사기 위해서다.
오래전 동남아 어디에선가 산 나무빗을 내동 써왔는데 미국집에서 챙겨 오지 않아 새로 산 플라스틱 빗이 그만 부러져버렸기 때문이다.
새 빗은 빗살이 촘촘한 꼬리빗으로 접이식이다.
이 빗으로 머리칼을 빗질하면 그럴 수없이 두피가 시원해 마사지 제대로 받은 느낌이 든다.
내 경우에 딱 적합한 빗인 것이, 숱이 적은 데다 머릿결 가늘어 파마가 잘 나오지 않아 생머리로 사는 구식이라서다.
그런 터라 머리를 깡똥하게 묶고 지내며 외출 시에는 모자를 덮어쓰면 된다.
여자는 가꾸기 나름이라는데 원래부터 생긴 대로 사는 자연주의자다.
성형은커녕 화장도 잘하지 않는 편이라 외양을 다듬고 꾸미는데 서툴다.
머리도 몇 년에 한번, 어쩔 수 없는 상황에나 파마를 할 뿐이며 아직 염색이란 걸 해본 적도 없다.
이 머리빗으로 인해, 얼마 전에 서울 지하철에서 본 여인이 문득 떠올랐다.
지하철은 선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리고 있는 중이었고 한산한 객실이라 손님들은 다 자리에 앉아있었다.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하기에 나는 출입문 가에 그냥 선채였다.
더러 눈 감은 사람 빼고는 남녀노소 할 거 없이 폰을 들여다보느라 고개를 숙였다.
경로석에 앉은 한 초로의 할머니도 남편의 폰을 넘겨다보고 있었다.
동시에, 동백기름이라도 바른 듯 매끈한 머리에 눈길이 갔다.
이젠 거의 사라진 쪽 찐 머리에 뜻밖에도 비녀가 꽂혀있었다.
그것도 흔한 백동 비녀나 놋비녀가 아니라 노리끼리 특이한 모양의 비녀다.
창이라도 하는 노인네인가.
한복 차림이 원칙인 고전무용을 하는 여인이나 국악인은 올림머리를 하려면 꼭 갖추는 전통 장신구가 비녀다.
그 외 여염집 경대에서 비녀라는 게 사라진 지 오래됐다.
어쩌다 아낙들이 긴 머리를 틀어 올려 풀어지지 않도록 연필이나 볼펜으로 쪽을 마무리하는 걸 혹간 보긴 했다.
그것도 삼사십 년쯤 전 얘기다
요샌 쪽머리 구경하기가 어렵던 차라 얼른 사진 한 장을 담았다.
오래 잊고 지낸 비녀, 그것도 모처럼 정식 비녀가 눈앞에 등장했으니 신기하기까지 하다.
게다가 반세기 전만 해도 흔히들 사용해 눈에 익은 일반적인 비녀도 아니다.
용잠이나 봉잠같이 거창한 비녀는 아니지만 비녀머리가 단순하게 생기지는 않았다.
박물관 전시장에서나 봄직한 비녀다.
마음 같아선 비녀 좀 자세히 볼게요, 하고 싶었으나 마침 내려야 할 역에 다다랐기에 그냥 하차했다.
어릴 적 외할머니는 평상시 일반 백동 비녀를 사용했지만 패물함에는 은비녀 옥비녀 흑단 목비녀가 들어있었다.
집안에 혼사 같은 대사가 치러질 때는 은비녀를, 삼복 때 친정 나들이를 가실 적엔 모시옷에 옥비녀를 꼽았다.
단아하면서 서늘하던 기품은 후리후리한 키에서부터 뿜어져 나왔지만 탐스러운 쪽에서도 느껴졌는데 그 유품들은 어디에 있을까.
신여성이었던 외숙모도 사진으로 보면 처녀 적에는 파마머리였으나 내 기억 속에는 늘 비녀 꽂은 쪽머리였다.
젊어서는 외삼촌이 인천에서 미두장을 했기에 이층 다다미방에 살림살이 으리으리했다고 언니는 그 시절을 곧잘 소환하곤 한다.
소학교를 인천 외삼촌네서 다녔던 언니는 란도셀을 메고 학교를 간 기억이 있다는데 육이오로 모든 게 막 내려졌다.
부랴사랴 고향인 대호지로 피난 오며 똑딱선 가득 살림을 싣고 와, 외삼촌 집에는 촌에서 보기 어려운 진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일본식 장롱과 장식장에 등나무 고리짝마다 양복 기지, 비로드, 양단이 차 있었고 발틀 재봉이며 죽세품 흔들의자도 있었다.
심지어 한쌍의 은제 신선로도 있었고 등잔불을 쓰는 촌이라 당연 불통인 벽걸이식 전화기가 이불장 옆에 장식품처럼 달려있었다.
그 모든 게 가정이 풍비박산 나며 하루아침에 흐지부지 다 흩어졌다.
외삼촌이 늘그막에 겨우 얻은 자식은 아직 미성년이라 외사촌은 당시 사정을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하였다.
하기사 외사촌은 제 몫의 고향 선산과 농지조차 소작인이 눈먼 땅처럼 가로채가서 하나도 건지지 못했으니까.
그 외 무엇보다 아까운 귀물 화로, 부엌 나뭇광에 방치돼 있던 일본제 큰 화로는 특별나게 잘난 인물이었다.
외사촌에게 물어보니 장정 둘이 들어야 겨우 옮기던 그 무거운 화로마저 깜쪽같이 증발돼버렸다고 한다.
월미도에서 외숙모가 안고 찍은 내 생애 최초 사진이 외삼촌 네 사진첩에 있었는데 그 사진들은 어디로 다 가뭇없이 사라졌을까.
언제이고 한번은 외사촌이랑 대호지에 가서 그 당시 무슨 일이 있었던지 더듬어보기로 했다.
빗에서 비롯된 상념의 가닥들은 낯선 여인의 비녀로 이어지며 끝 모르게 풀려나갈 기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