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철쭉 가을 억새의 명소로 알려진 황매산(해발 1,113m)이다.
철쭉철이 아직 이울지 않았다기에 안개비 자욱한 날 황매산으로 향했다.
봄이면 진분홍 주단을 드넓게 펼친 듯 산상화원 황홀하고, 가을엔 억새 물결 하얗게 흐드러져 장관 이룬다는 황매산이다.
특히 8부 능선에 펼쳐진 철쭉군락지까지 접근성 좋게 도로가 잘 정비돼, 연세 드신 분들을 모시고 가족 산행을 즐길 수 있다.
황매산은 경상남도 합천군과 산청군의 경계에 위치했다.
부산에서 가려면 두 시간 반 이상 소요된다.
함안 산골로 들어서자 비가 내려서인지 모내기한 논에서 개굴개굴 개구리 차지게 노래 불렀다.
의령 지나 황매산 가까이에 이르니 비 그친 대신 도로 선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도처에 안개 짙게 깔렸다.
오가는 차들도 거북이 행보, 전조등 안개등을 켜도 가시거리가 짧아 조심조심 감속 운행들을 한다.
한철 잠깐인 철쭉꽃 보여주려 앞장서 안내해 준 아들, 신경 쓰며 운전하느라 수고 곱절로 했겠구나.
오래전, 세석평전 철쭉에 실망한 다음 해 바래봉 철쭉제에 갔을 때 철쭉 군락지 조성 경위를 들었다.
60년대 말, 구릉진 초원에 목장을 조성하여 시범적으로 양 떼를 방목했는데 먹성 좋은 양들은 풀만이 아니라 나무순까지 족족 먹어치웠다.
다만 그라야노톡신(grayanotoxin)이란 독성 있는 철쭉만은 남기게 되면서 군락지를 이뤘다는데 황매산도 이와 같은지 목장 임도가 나있다.
당시 바래봉에서 본 환상적인 철쭉은 속계의 시정인이 아닌 하늘의 귀빈을 위해 마련된 잔치 자리 같았다.
초대받은 귀한 손님은 신새벽 운무로, 한나절 산들바람으로, 저물녘 푸른 이내빛으로 철쭉축제에 참여할 것이고.
그날 철쭉 화원을 사진에 담으며, 도무지 미숙해 성에 차지 않기에 제대로 된 솜씨의 사진 은근 욕심내봤다.
물론 이전에도 몹시 답답해 한적 여러 번이긴 했었다.
덕유산 설화와 마주했을 때도 그랬고, 연꽃 만개한 세미원에서도, 망양정 일출 앞에서도, 기막힌 홍도의 낙조를 보면서도 그랬다.
그 한순간이 지나버리면 영영 놓쳐버리고 마는 정경일 때 안타까움은 훨씬 진했다.
이번 또한 역시나, 다.
안개비에 젖은 황매산 철쭉꽃의 진면목인 처연미는 눈으로 그리도 처절한 아름다움이었는데....
그렇듯 자연의 비경을 온전히 백 프로 묘사해 내기엔 글도 그림도 사진도 한계가 있으니.
고흐는 아를르에서 본 풍경의 아름다움을 1%도 자신의 화폭에 담아내지 못했다고 토로했다.
하물며 고흐가 그러할진대 갑남을녀의 하나인 내가 표현상의 만족을 어찌 감히 욕심내랴.
시설이 완비돼 있는 오토캠핑장에 주차시키고 잘 다듬어진 산행로 따라 우리도 자욱한 안갯속을 걸어 올라갔다.
건조한 사막에서 그리도 아쉬워했던 안개.
보얗게 안개 떠도는 숲, 부유하는 구름띠 비 되어 숲을 적셨다.
초목은 더할 나위 없이 싱푸르렀다.
습습한 대기 심호흡하자 세포의 감각 저마다 일깨워졌다.
허나 압축과 절제 서툴러 시 쓰기 그름을 아는지라 주어진 분복대로 사는 사람.
주절주절 풀어놓는 사설이 길지만 내 길 아닌 시인 욕심내지 않으려 다둑거린다.
"물방울까지 이렇게 잘게 써는
그는 과연 누구인가."
박성룡 시인의 시가, 흐르는 숲 안개에 겹친다.
숲길에 접어드니 여기저기 물 고인 고랑이 제법.
까치발로 물길 피해 가다 툭 건드린 큰까치수염 꽃 사방에다 대고 물안개 뿌린다.
시큼한 까치수염 연한 줄기 툭 분질러 씹었던 옛일 생각난다.
비 젖은 숲 어디선가 뻐꾸기 소리 멀어 사위는 고즈넉하다 못해 고적하다.
등짝에 초록 점찍은 두꺼비만 위장한 채 눈 꿈벅.
비옷 입은 캠핑객들 마치 허공을 부유하는 유령이듯 산길에 홀연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하였다.
향방도 알 수 없는 숲 어딘가에서 은은히 들리는 뻐꾸기 소리 안개에 젖어 더욱 애연스러웠다.
정상에 올랐어도 산의 모습은 짙은 안개에 가려 자취 묘묘했다.
산세는커녕 나무조차 제대로 윤곽 잡히지 않으니 말 그대로 오. 리. 무. 중이라 산행 안내판에만 의지한 채다.
지척 구분 안 되는 이런 숲안개는 처음, 산에 와 산을 못 보고 가기도 첨이다.
산정에 세워진 하늘 계단에 오르면 잔 물결조차 보인다는 산 아래 합천호는 어디짬에 있는고?
이른 새벽 호수에서 물안개 피어오르면 더할 나위 없는 신비경을 보여준다는데.
황매산 세 봉우리 산 그림자가 합천 호수에 잠기면 매화 세 송이가 푸른 물에 피어있는 듯 아름다워 수중매라 한다는데.
시야가 탁 트여 날씨 청명하면 저만치 지리산, 덕유산, 가야산 등을 조망할 수 있다는데 겨우 내 발치만 보일 따름이다.
백마 군단처럼 치달리던 안개 뭉텅이가 갑자기 소낙비로 변해 굵은 빗줄기 퍼부어댄다.
모산재 기암괴석이고 수목원 초목들이고 뭐고 다 생략한 채 잰걸음으로 하산하며 가을 억새평원 산행을 내심 기약했다.
산을 내려와도 여전 젖어드는 비, 뒤죽박죽 기이한 세태 닮아 장마철도 성급히 달겨드는가 보다.
위치:경상남도 합천군 가회면 둔내리 황매산 공원길 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