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
화개에서 계류 따라 오르다 의신 마을 왼편에 떨구고 다시 접어든 청산. 저 아래 굽이 트는 벽계수. 첩첩산 좌우로 거느리고 조붓한 오솔길을 걷는다. 방초 푸르른 유월의 지리산 대성골은 다만 가슴을 뛰게 한다. 마구 울렁이게 하다가 마침내 눈물 핑 돌고 현기증에 아뜩하기조차 하다. 예가 곧 선경이요 도원인가 싶다. 자작나무 고로쇠나무 외에 이름 모를 수종樹種도 가지가지. 머루 다래는 물론 산딸기에 오디 열매 복숭아 아그배도 심심찮게 열렸다.
산속의 산. 심산유곡 여기에 처음 발자국 내디딘 이는 누구일까. 풀섶 열고 숲 가르며 길 틔운 이는 누구였을까.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보이는 건 오직 하늘과 숲이요 들리는 건 산뢰山賴에 여울목의 폭포수 울림뿐. 새소리조차 뜸한 적요. 김장마저 감도는 정적.
꽤 한참을 오른 듯한데 안내판은 표고 500m 절터라 쓰여 있다. 돌돌돌 샘물 흐르는 소리에 시선을 올리니 언덕 위의 빈 절터. 처음 만난 것은 저승꽃 피듯 해묵은 이끼가 함빡 돋은 주춧돌들이다. 그리고 한 무리 하늘대는 달개비꽃 제비붓꽃에 대숲 일렁이는 바람과 무성한 칡덩굴. 평지엔 이미 진 찔레꽃이 높은 데라 지금 한창으로 청향 넘나 든다.
꽃은 피느니. 또한 마침내 시들어 떨어지느니. 그러나 씨앗 품어 세세에 이어질 윤회의 고리를 맺거늘. 차라리 무정이 유정이고 유정이 무정인가. 사람의 자취로 따습던 이 자리는 완벽하게 비어있는데 기와 쪽 몇 개 묻어두고 들꽃과 잡초만 가득 가꾸며 마냥 허허로이 텅 빈 절터.
인연으로 생긴 일체 형상은 이윽고 없어지게 마련. 모든 것은 생멸生滅하여 상주常住함이 없다 하였다. 허나 아무리 제행무상이기로서니 이리 덧없을 수가. 한동안 망연자실 허탈하다 못해 비감하고 차라리 창연해진다. 불탑만 우뚝 선 감은사지에서 느꼈던 감회와는 다르다. 역사로도 전설로도 남지 않고 의미 없이 지워진 흔적. 하긴 이름 전한 들 그게 무어 대단한가. 이미 그 자체가 허상에 매인 애집. 애착생사愛着生死에서 초탈했음이리. 생도 없고 멸도 없는 적멸을 증득했음이리.
기실 여기는 구전으로나마 절터라 칭해 내려옴만도 대견하다. 이 깊고 깊은 산중에 뉘 있어 말 전하랴 싶다. 인근에 화전민의 산막은커녕 약초 캐는 발길조차 자주 닿을 것 같지 않은 오지. 요즘처럼 산행 인구의 폭발로 웬만한 산은 장터가 다 됐지만 아직도 인적 드문 이곳. 길이라고 나있기는 하나 돌아서면 지워질 듯 희미한 길. 아마도 이 절터 얘긴 바람이 바람에게 귀엣말 전했으리. 차마 그냥 스러질 수 없어 허공에 메아리로 띄웠으리.
바스락 소리에 흠칫 놀라 돌아보니 다람쥐다. 이 절 번성하여 노장 스님에 사미승까지 있던 시절. 헌식돌에 쪼르르 달려오던 그 옛적 다람쥐의 몇 대 손이 될까. 무심한 다람쥐는 하릴없이 나를 건너다보다가 축대 틈새로 사라진다. 윤기 어린 햇잎 달고 유월 볕에 눈부셔하며 입구께를 지키는 감나무 두 그루. 고목 둥치로 보아 수월찮은 세월 감고 있는 듯 여겨지나 도무지 헤아릴 길 없는 이 절의 내력.
산세 험하고 드높은 위치로야 생식하는 고행승의 토굴 자리일 것 같지만 장방형 번듯한 터가 절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완만한 능선 따라 전답이었음 직한 층계 드러나고 그 아래 한껏 우거진 청대 숲. 부속 암자 하나쯤 거기 더 있었을 것도 같다. 주추며 축대의 바위 빛으로는 불교가 크게 융성했던 신라시대 절터란 느낌이 든다. 현존하는 쌍계사 칠불암 그 밖에도 큰 사찰이 골골에 있었다는 고증이 예까지 포함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해서 다시 보면 절터의 선연함이 아무래도 미심쩍다.
혼란은 정리되며 그보다는 훨씬 후대로 생각이 미친다. 통한으로 얼룩진 비극의 민족사에 기록된 암자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이르러선 전율이 인다. 어쩌면 빨치산 은거지로 불태워졌을지도 모를 일. 하지만 대명천지에 가슴 활짝 편 형상인 해밝은 지세라 은둔처 같지는 않다. 도무지 감이 짚이지 않을 정도로 완전한 폐허가 된 절터는 단지 그 자체이다. 무슨 일로 이리 기둥 하나 남김없이 스러진 걸까. 퇴락해 주저앉음도 아니요 고스란히 연기가 된 모양이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근세 역사와 무관하지 않으리라. 유월 탓인가. 복구의 원願 조차 세울 수 없을 만큼 처절했던 50年代 어느 날.
지리산 공비 출몰. 공비 토벌. 이렇듯 살벌한 단어를 라디오 뉴스로 들으며 자란 유년기. 때로는 피아 간의 공방전 끝에 참혹하게 죽어 거적 떼기에 덮혀진 시신의 사진도 신문에 나곤 했다. 동족상잔의 총성은 휴전으로 멎었으나 끝까지 남아 버티던 저항세력인 인민 유격대란 이름의 게릴라. 어둠 내리면 민가 습격해서 식량을 약탈하고 갖은 만행을 저지른 그 파르티잔의 근거지가 지리산이었다. 그때의 지리산은 오직 공포의 산이었고 백두산보다 더 먼데 있는 이방의 산이었다.
국가를 구성하는 자연인을 지칭하는 인민이란 말이 무엇보다 두렵던 당시. 선량한 백성들은 뜰의 백일홍 붉은빛에도 가슴이 철렁했다듯 지금까지도 적색에는 알레르기를 일으킨다. 반공 방첩에 길들어온 세대라서 인가. 근자 들어 지리산, 남부군 등으로 빈번하게 조명되는 이곳이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남과 북의 첨예한 대립상에 생각 미치면 선뜻 내키지 않는 긍정. 때가 차매 이뤄질 한 핏줄의 통일이야 갈망이 아닌 필연이겠지만.
물론 좌든 우든 한쪽의 선택을 강요당한 시대적 상황을 간과해선 안 되리라. 따라서 죄의 몫은 그들 것이 아닐 수도 있다. 큰 물결에 떠밀려간 불가항력의 운명 같은 것. 결국 극한의 절망 상태에서 그저 살고 싶다는 본능 외에 무엇이 남겠는가. 이데올로기 따위와는 결별한, 오직 살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투쟁 그뿐이었으리라. 위대한 역사가 탄생되리라는 착각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혹한과 기아만이 기다리고 있었을 터. 그들이 맞은 최후의 순간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유월 숲같이 짙푸른 젊은 넋을 무수히 품어 안은 지리산. 한동안 마주 선 그 산만을 묵연히 바라보았다.
절터를 내려서며 허상虛想을 지우듯 맴도는 의문부호 거두어 바람에 날린다. 그마저 부질없는 짓이다 싶기에.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