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포도밭이 많더라니

by 무량화

도산서원을 거쳐 퇴계종택에 들렀다가 지척거리인 이육사문학관을 찾았다.

어쩐지 인근 농가에 유난히 밭마다 포도 시렁이 자주 보이더라니.

과연 시인이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이라 노래한 대로였다.

기념관은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백운로 525번지, 대로변 좌측에 위치하고 있었다.

색유리로 치장된 모던한 디자인의 건물 예각은 서릿발같이 날카로운 시인의 푸른 혼을 의미하는가.

시인의 본명은 이원록, ‘264’는 첫 번째로 수감되었던 당시의 수인번호이며 필명 이 활로도 활동했다.

광복의 염원 담은 <광야>와 같은 시를 통해 일제에 항거한 민족 시인 이육사 선생 기념관에 서니 장소 역시 예사롭지가 않다.

육사는 펜만으로 조국 광복을 위한 투쟁의 수단으로 삼지 않았다.

의열단 산하 단체에서 군사정치 간부 교육을 받고 무장투쟁을 하며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베이징대학 사회학과에 입학해 루쉰(魯迅)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의 열의를 더욱 다졌다.

1933년 귀국해 육사란 이름으로 시 <황혼>을 신조선 지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그 후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였고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했다.

유명한 <청포도>를 비롯하여 <교목(喬木)> <절정(絶頂)> <광야(曠野)> 등을 그즈음 발표했다.


생가터에 자리한 청포도 기념시비/ 젊은 날의 시인과 시인이 태어난 생가로 수몰지구가 되며 이전해 복원했다는 육사 기념관에서다.


어디다 무릎을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시 <절정> 일부다.

1943년 모친 소상에 참석했다가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이듬해 베이징 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일제에 저항하며 치열하게 투쟁해 온 그는 열일곱 번째 수감생활을 끝으로 해방 한 해 전 향년 39세로 눈을 감고 말았다.

그처럼 기개 맑고 고결한 영혼을 키운 땅인데 어련하랴.

백두대간의 낙동정맥에서 가지 친 산세, 웅혼한 기상으로 둘러섰고 그 앞에 펼쳐진 낙동강 지류 따라 원촌 들판의 옥답 푸르렀다.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한 광야란 시가 자동 오버랩되는 풍광이다.

높푸른 산이 감싸 안은 낙동강 상류 원촌마을,


퇴계의 14대 손인 그는 퇴계가 남긴 정신적 유산을 물려받았음이리라.

그처럼 시인에게 각인된 항일민족운동의 정신적 기반은 안동 유림의 선비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시를 익힌 그답게 고전적인 선비 의식과 한시의 요소를 지니고 있는 그의 시풍은 풍부한 서정성에서 출발해 강렬한 저항의지로 옮겨갔다.

그 땅이 그 인물을 낸다 하였다.

위대한 인물이란 후대의 지표로 각인된 민족의 큰 어른을 이른다.


언필칭 나라를 바르게 이끌겠노라는 정치판의 일상화된 거짓과 위선, 배신과 변절로 점철된 이 시대라서 특히 더 그리운 지도.



가는 날이 하필 월요일, 휴관일이라 안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하긴 대부분의 기념관 양식이 그러하듯 주인공의 흉상과 친필 원고 등 유품 약간이 전시되어 있다고

시인의 문학정신이 담긴 시집과 독립운동 활동상이 녹아있는 각종 자료를 갖춘 전시실은 1층.

2층에는 시청각 시설 및 탁 트인 조망권 건너 백두대간에 감싸인 낙동강이 한눈에 굽어 보이는 시상(時想) 전망대가 마련돼 있다고 팸플릿에 나와있다.

육우당이란 현판을 단, 근사한 생가가 언덕 위에 덩그러니 서있지만 실지 생가는 안동댐 건설로 수몰 위기에 놓였었다고.

하여 현재의 육우당은 원 자리를 옮겨 이전 복원시킨 건물로 문학관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거리에 육사 생가터가 있다.

여섯 형제가 우애 있게 산다는 의미를 지닌 육우당이나 열여섯에 집 떠난 육사는 중국 땅에서 눈을 감아 한 줌 재만 고향에 묻혔다.

형과 아우들도 의열단에 가입한 항일운동가 집안의 2남인 그는 나이 고작 마흔도 못 채우고....

여기서 아쉬운 건, 터무니없이 큰 문학관과 관리가 안 된 물 마른 연못 터며 잔디광장의 웃자란 풀더미 만이 아니었다.


시인의 뜻과 다른 현 세태의 무신경함과 무심이 심히 거슬렸다면 내가 까칠해서일까.


문 잠긴 채 비어있는 육우당과 그 아래 기념관 뒤편에 선 문학생활관은 연수시설로는 엄청난 규모에 비해 쓰임새 적어 세금만 축낸 허깨비 같았다.

공간 그룹 스페이스의 야심 찬 작품이라는데 누구나 보면 대단하다는 느낌과 함께 세금 지나치게 퍼부었다는 생각부터 들 거다.

이 기념관을 찾은 어떤 자가 점령군 망언을 하여 빈축 샀듯이 정녕 빈축 사고도 남을 얼빠진 안동시의 과소비 현장이었다.

뒤편에 아파트처럼 크게 들어선 문학 생활관은 실제 얼마나 자주 사용되는지도 궁금할뿐더러 잡초에 싸인 채라 못내 안타까웠다.

영양 조지훈문학관에서도 개탄하였지만 왜 기념관을 그리 엄청나고 으리으리하게만 짓는지?


조촐하다고 존경심조차 졸아들까?

나약한 많은 문인들이 친일파로 변절하였지만 끝내 절조를 지킨 시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 되었다.​


광야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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