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산 언니집에서 비교적 가까이 있는 조선 왕릉. 가벼운 소풍삼아 서오릉으로 향했다. 간식거리로 싸들고 간 과일과 음료수 박스는 매표소 입구에서 보기좋게 제지당했다. 지난가을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능역이 매우 넓어서 서오릉 전부를 둘러보려면 두서너 시간은 좋게 걸려 출출할 때 군입거리로 삼을 생각이었는데. 그러나 일반 공원이 아닌 신성한 능역이므로 음식류는 반입불가라기에 도로 차에 두고 왔다.
면적이 워낙 광대해 산 전체가 다 능역인 서오릉. 동구릉 다음으로 규모 큰 조선왕실의 가족무덤인 셈이다. 초입의 명릉에서 출발, 산비알 곳곳에 조성된 능에다 고개 넘어 저 멀리 자리한 창릉까지 드넓은 공간을 아우른 서오릉이다. 바야흐로 봄 지나 녹음으로 향하는 숲, 하늘빛 푸르고 바람 맑은 주말이라서인지 가족 단위로 나들이 나온 시민들이 제법 많았다. 연인끼리 둘이서 손잡고 또는 삼삼오오 친구들 무리 지어 산책길을 걷거나, 등산복 차림으로 트래킹에 나선 이도 있다.
조선은 519년이란 긴 세월 동안 유교라는 통치이념에 의거, 나라를 다스렸기에 역대 왕조의 무덤 역시 숭모의 뜻을 담아 장대 엄숙하게 꾸몄다. 따라서 조선왕릉은 자연이 수려하게 어우러진 공간에다 전통문화를 기조로 한 건축양식으로 위엄있게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렀다. 그와 같이 살아있는 문화유산으로서의 역사성과 우수성, 그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서오릉. 하긴, 능침이 세계적 문화유산으로 소중히 받들어진다 한들 이미 백골이 진토 됐을 영혼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면 허망스럽다.
사적 제198호인 서오릉. 경릉(敬陵)·창릉(昌陵)·익릉(翼陵)·명릉(明陵)·홍릉(弘陵)의 다섯 능을 아우른다. 그밖에 조선왕조 최초의 ‘원’인 순창원(順昌園), 수경원(綏慶園), 대빈묘(大嬪墓)도 서오릉에 함께 자리했다. 여기서 명칭이 능과 원과 묘로 구분되는데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왕세자와 빈의 무덤은 원(園), 대군이나 공주 기타 무덤은 묘(墓)라 칭했다. 이름이 무엇이든 저승보다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했으니, 내 발로 대지 딛고 내 눈으로 경치 구경하며 풍광 즐기는 나, 왕족이 부러울쏜가 싶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조카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업보일까. 세자인 맏아들이 죽자 1457년 세조는 의경세자의 묘를 이 자리에 만들며 서오릉의 역사는 시작됐다. 이후 의경세자가 덕종으로 추존(실제로 왕위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세상을 떠난 후에 왕의 호칭을 내리는 것 )되면서 경릉(敬陵)으로 개명하고, 덕종비 소혜왕후(인수대비)가 세상을 뜨면서 경릉에 같이 안장된다. 성종의 어머니인 소혜왕후는 부녀자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기 위한 책 내훈(內訓)을 펴냈다. 그녀는 의경세자와의 결혼생활로 세 자녀를 두었으나 스무 살 나이로 세자가 요절하자 그 후 대왕대비 자리에 있으면서도 여자는 뒤로 물러나 있어야 한다는 지론대로 살았다. 66세로 눈감을 즈음엔 손자인 연산군의 폭정을 목도하기도 했다.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가 묻힌 창릉(昌陵)은 서오릉에서 왕릉으로 조성된 최초의 능. 형인 의경세자(덕종)가 20세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나자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며 1468년에 세조의 선위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아버지의 죄업 때문인가, 재위 1년 2개월 만에 경복궁 자미당에서 애석하게도 20세로 세상을 등진다. 삼대에 이른다는 과보, 죄와 벌은 무섭도록 엄혹했다. 뭇 역사가 깨우쳐주건만 여전히 죄업 되풀이 쌓는 어리석은 자 많고, 아직도 존재하는 세습왕조의 불편한 진실이라니...
숙종의 원비였던 인경왕후의 능인 익릉(翼陵), 그리고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인 명릉(明陵)에는 당대의 현실을 소설화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가 태어나게 된 주인공 두 명이 누워있다.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弘陵)은 맨 끝으로 만들어졌는데, 정성왕후는 조선 역대 왕비 중에서 중전으로 가장 오래 있었으나 한점 소생도 두지 못한 비운의 왕비였다. 칠거지악에 매여 투기조차 할 수 없던 인고의 세월, 왕실에서건 사가에서건 아녀자의 한 얼마나 아렸으랴.
서오릉은 도시의 빌딩숲 바로 옆, 너그러운 산세를 지닌 야산 자락에 소나무 참나무 우거져 있는 무척 넓은 터를 깔고 앉았다. 살아생전 최고로 호의호식하며 대궐에서 지내다가, 눈 감은 다음 역시 풍광 좋은 자리의 곱게 다듬어진 잔디 아래 잠들 수 있는 특혜를 누리니 선택받은 왕가는 왕가다. 능침 내 제향공간에는 신성지역임을 나타내는 홍살문과 정자각을 세우고 수라간, 수복방, 비각 등이 배치되어 있다. 봉분 주위에는 상석, 장명등, 망주석, 문무석, 석상이 도열해 있으며 동, 서, 북 방향으로 능을 감싼 곡장(담장)을 둘렀다.
순창원에는 명종의 원자로 열세 살 나이에 세상을 뜬 순회세자와 공회빈 윤씨를 합장했다. 수경원은 조선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가 묻혔다. 영빈 이씨는 영조가 아낀 후궁으로 영조와의 사이에 칠 남매를 둔 다복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생모였던 그녀는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 쓰여진 바에 따르면, 영조가 세자 문제로 고심하고 있을 때 결단을 아뢸 정도로 냉엄한 지어미였다. 누구라도 자식이라면 제 목숨보다 더 귀히 여기게 마련이거늘 그녀 흉중의 비통함이야 일러 무엇하랴만.
희빈 장씨의 묘인 대빈묘는 본래 양주 인장리에 있었으나 광주 진해촌으로 이장됐다가 다시 서오릉으로 옮겨졌듯 저승살이도 편치 않았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장씨는 궁녀로 입궁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아 숙원(淑媛)에 봉해졌다가 다시 소의(昭儀)의 품계를 받았으며 숙종의 첫 아들 윤(경종)을 낳아 희빈이 되었다. 숙종은 윤을 원자(元子)로 책봉한 다음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의 자리에서 폐위하고 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다. 몇 년 후 인현왕후 복위 문제와 영조의 생모가 된 숙빈 최씨 독살사건 사주가 발단이 되어 장씨는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결국은 인현왕후를 무고한 죄 덮씌워 내치고도 장씨는 형장에 끌려와서까지도 독을 피우다 사사당하는 우여곡절의 주인공이 된다.
인생, 저마다 뒤돌아보니 아주 짧은 순간에 꾼 한바탕 봄꿈이었고 너나없이 희비쌍곡선을 그리며 엮은 파란만장이었더라. 아파트 201호나 202호나 속내 들여다보면 사람살이 어차피 거기서 거기, 오십보백보더라. 왕후장상이라고 아무런 고뇌 없었을 것이며 만석지기라 하여 하루 밥 수십 끼 먹을 수 없고, 보잘것없는 촌부라도 소소한 행복감에 주름진 얼굴 가득 웃음꽃 피어나기도 하더라. 장삼이사 불러 세워 지난 세월 들어보면 사연 기막히지 않고 섧지 않고 아프지 않은 사람 아무도 없고 매사 충족 느끼며 산 사람 거의 없더라. 기쁨과 슬픔이 교차한 한생 끝나 능에 누웠건 바다에 뿌려졌건 그 모두가 흩날리는 한줄기 바람인 것을. 살아온 흔적 추하지 않도록 청정하게 살다 산뜻하게 마무리 잘 짓고 싶다는 바램이 그래서 더 곡진해진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