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비 듣는 날

by 무량화

산간 날씨는 장난 심한 개구쟁이 손에 쥔 공처럼 어디로 튈지 종잡을 수가 없다.

쾌청했다가도 급전직하, 뇌성벽력 몰고 오는 조울증 환자만큼 변화무쌍하다.

멀쩡하던 창천에 먹장구름 밀려오자마자 먼데 우레소리에 이어 비꽃 내리는가 싶더니 금세 몰아치는 자드락비.

삽시에 태도 바꿔 좌르륵 쏟아지는 빗줄기에 숲은 거칠게 뒤챈다.

아예 마구 요동질친다.

산골짜기에서 안개 내리듯 부옇게 떠밀려오는 소낙비 두드려대니 초목들 제각각 고유의 향기 깨어나 숲에선 한약방 내음 같은 게 풍긴다.

빗줄기의 터치로 녹음방초 저마다 뿜어낸 향훈 그윽이 고여드는 숲.


맞다.


소낙비가 풀과 나무새 고유의 향취를 맘껏 흔들어놓았다.


오이풀 비비면 오이냄새 싱그럽게 나고, 더덕뿌리 자라는 곳에선 더덕냄새 난다는 것만 알았지 거친

빗방울이 산야초 향을 일깨울 줄이야.



풀과 나무 빛깔 산뜻하게 되살아나고 뜰앞 나리꽃 자태 한층 또렷해지며 날렵한 발레 포즈를 선보인다.


이름 모를 야생화 스치기만 해도 상긋한가 하면 달 떠오르는 시각 부스스 열리는 달맞이꽃은 이울지 못한 채 비를 맞고 있다.


솔잎 끝에 맺힌 알알이 영롱한 구슬방울.


소나무 흠씬 적신 빗물은 투명한 눈물 되어 연달아 툭툭 떨어진다.


자잘한 관목 잎새 춤추게 하며 후드득 듣는 빗소리야말로 얼마나 운치 가득한지.


활엽수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함석지붕에 내리는 빗줄기 떠올리게 하고.


비에 갇혀 창을 통해 캐빈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여태껏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 또한 미상불 나쁘지 않은 소득이다.


추녀 아래 낙수진 빗물로 동글동글 패인 자국도 오랜만에 만난다.


사막 기후대에선 여름에 거의 비구경을 못하기 때문이다.


색다른 묘미를 즐기게 해주는 하이 시에라에서의 여름휴가다.



난타하듯 마구잡이 쏟아지는 빗방울들이 헌식돌이라 칭한 바위에 얹어둔 밥알을 흩뜨린다.


마당가 잣나무 아래 하얀 돌이 있기에 우리 식사에서 아주 조금 덜어 이웃들 공양거리를 놓아두었다.


이름을 몰라 임시 지어준 애칭 파랑새와 아기 다람쥐가 주변을 기웃대기에 챙겨준 먹이다.


다람쥐는 청설모가 아니라 밤색 줄무늬가 있는 진짜 다람쥐인데 경계심이 대단하다.


가정교육을 엄히 받았나 보다.


자주 산토끼도 놀러 오나 풀만 먹고 사는지 사람들 먹거리엔 도통 관심 없어 아예 본숭만숭이다.


머리 위에 관처럼 청남빛 깃털을 꽂은 파랑새는 색깔이 참 곱고도 영롱하다.


마치 갯벌 짱뚱어처럼 쪼르르 내닫는 다람쥐는

크기가 도마뱀 정도에서부터 생쥐만 한 애기라 아주 귀엽다.


물론 비가 오면 녀석들은 두문불출, 아예 꼼짝도 하지 않는다.


캐빈까지 곰이 오니 음식쓰레기 조심하라는 주의글 적혀있고 자물통 달린 무쇠 곰통도 비치되어 있던데 아직 근처에서 곰은 못 봤다.


지척에서 인기척이 나도 전혀 개의치 않고 나뭇잎 뜯는 사슴은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우릴 빤히 건너다보기만 한다.


언제 적부터 해치지 않을 거란 믿음이 들었는지 모르나, 캐빈 침실에도 박제된 숫사슴 머리가 걸려있던데...



지나가는 잠시 비가 아니라 끌어모았던 홧증 한바탕 풀어낼 듯 기세등등한 걸로 미루어 아무래도 이번 비 좀 길어질듯하다.


가벼운 읽을거리로 들고 온 소설 펴놓고 독서삼매에 빠지다가 가끔씩은 허리 펴고 창밖 빗줄기 바라보기도 한다.


책 읽다 지루하면 호수 아래 계곡으로 내려가 비옷 입고 우중 낚시하는 구경이나 하고...


우비를 입어도 흠씬 젖어들면 그래, 흠뻑 더 비를 맞아보자~ 그런 기분이 들겠지.


운동화가 조금 젖었을 때는 더 젖을까 물구뎅이 조심하지만 완전히 젖으면 물속 첨벙거리며 걸어보고 싶듯이.


여행 중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불편할 법도 하지만 만사 생각하기 나름이고 느끼기 나름이며 즐기기 나름.


나이 드니 이처럼 뭐든 낙낙하게 여겨지는 여유로움이 좋다.


날 들면 숲 속 이웃들 하나씩 얼굴 내밀테고 그때쯤 새소리 낭랑해지며 왕나비 고운 나래짓 꽃에 머물리라.


이래저래 심심할 틈이 없는 산간의 나날, 이 역시 일상이 된다면 심상해질지 모르겠지만.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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