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걷다가 흐드러지게 핀 무꽃을 만났다.
한밭자리 가득 연연하게 하늘거리는 무꽃 정경은 누구라도 발걸음 멈추게 만들만했다.
요샌 웬일인지 여기저기서 이런 밭이 가끔씩 보인다.
농작물을 심어는 놓고 수확을 포기해 그냥 밭에 널브러져 있는 양배추밭, 브로콜리 밭을 본 적이 있다.
인건비 때문에 그렇다는 말은 있으나 속내 정확히 모르겠다만.
암튼 그런 밭에 들어가면, 뭐야? 이럴 수가~, 아까워라, 너무했네, 등등 여러 생각이 겹쳐진다.
예전에 들은 얘기가 문득 떠오르기도 한다.
새끼들에게 속을 다 파 먹히고 빈 껍질만 남는다는 거미.
염낭거미는 나뭇잎 둥지에서 알을 낳은 다음 자신의 몸을 자식들에게 먹인다.
아무것도 모르는 새끼 거미는 어미의 살을 파먹으며 성장을 한다.
우렁이도 마찬가지로 어미는 새끼들한테 살을 다 내어준 다음 빈 껍데기 되어 물살에 둥둥 떠내려간다고 했다.
새끼는 어미 우렁이의 살을 먹으며 자라 어미 우렁이 속이 다 빌 때가 되면 그제야 혼자 움직일 수가 있다고 한다.
언젠가 극장에서 펭귄 영화를 보고 엔딩 장면의 울림이 하도 커, 쉬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수컷이 부화한 새끼를 깃 속에 품은 채 발아래로 내려놓지 않아 결국 자신은 굶주린 데다가 얼어서 죽고 말았다.
숭고하다는 단어 하나로 헌사를 바치기엔 너무도 절절한 안타까움이고 처절함이었다.
한참 전에 가시고기라는 조창인 소설이 눈물샘 꽤나 자극했다.
부성애의 극치를 보여준 가시고기는 민물고기로 1·2급수에서만 산다고 한다.
알을 낳고 떠난 암컷을 대신해 한순간도 집을 떠나지 않고 알을 돌보며 부화할 때까지 옆에서 지킨다.
먹이도 먹지 못한 수컷은 쇠진할 대로 쇠진한 육신마저 새끼들 영양분이 돼 주고 생을 마감한다.
이렇듯 가시고기는 아빠의 온전한 헌신으로 새끼 고기를 품어 키운다던가.
동물은 그렇다손 쳐도 식물은 어떠할까.
무밭을 지나는데 만발한 무꽃이 아주 볼만했다.
한밭자리 가득 연보라꽃 흐드러진 무밭은 경탄감이었다.
시선은 꽃에게로만 모아졌다.
그러나 무밭 가장자리에서 전모를 들여다보고는 말문이 막혔다.
꽃은 윗부분 뿐이고 수많은 씨앗꼬투리를 매단 무 줄기는 눗누러니 시들었다.
수많은 꽃을 피워내기 위해, 열매를 맺기 위해, 묵묵히 바친 혼신의 노고가 여실히 드러났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무질서하게 마구 뒤엉킨 줄기는 기운에 벅찬 듯 바로 서지도 못하는 데다 생기 잃은 채 변색이 됐고 밭두렁 무는 반 넘어 헐벗은 채다.
마치, 노인네 성치 않은 치아가 잇몸 위로 들쑥날쑥 솟듯 그래서 저작작용이 어려워지듯 힘없이 솟아있는 무 뿌리.
땅 위로 드러난 무를 집어 들자 무게감 전혀 없이 가볍디가벼워 허깨비 같았다.
메마른 대궁과 속이 비어버린 무, 無化된 무.
영속적인 미래를 위해 존재의 과거는 기꺼이 무화되어 버렸다.
끊임없이 자신을 태워 마침내 무화 돼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제 한 몸 아끼지 않은 흔적에 그만 숙연해졌다.
마지막 한 방울 진액까지 다 끌어모아 자손이자 미래인 꽃, 나아가 씨앗들에게 다 내어주고 쭉정이가 된 무 뿌리.
생명체는 모성본능만이 아니라 부모의 아낌없는 살신 모정(殺身母情)과 살신 부정(殺身父情)으로 대를 이어가도록 설계된 존재였음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