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운 일 아냐

by 무량화


98년 신록의 계절에 손자가 태어났다.

제 누나와는 두 살 터울이다.

고등학생 손녀는 유학을 와 딴에는 적응해 보려 애쓰다가 영어 때문에 자존심 왕창 상해 몇 달 만에 되돌아갔다.

초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미국에 온 손자는 유학 생활은 물론 미국 문화에 즐거이 적응해 나가고 있다.

뉴저지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현재 LA 소재 하이 스쿨에 다니는데 지난주 여름방학을 맞았다.

내년이면 본격적인 대학 진학 준비 모드로 진입하게 되므로 올여름방학을 기해 한국에 다녀올 예정이다.

해서 생일 며칠 앞당겨 맘 맞는 친구들 몇을 초대해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조촐하다지만 환갑상 차리듯 제 고모가 요모조모 미리 계획을 세워 장을 보았으므로 상차림이 제법 푸짐했다.

조카와 녀석의 친구 셋을 차에 싣고 우리집으로 와서 얼음 채운 쿨러에 음료수도 종류대로 챙겨 넣었다.

점심엔 손수 바비큐를 구워주곤 배스킨라빈스에 주문한 아이스크림케이크를 찾아왔다.

친구들이 알차게 준비해 온 생일선물을 받아 들고 계면쩍어하는 손자에게서 문득 어릴 적 얼굴이 보였다.

생일 케이크의 촛불 점화도 쑥스러워하면서 손사래질이라 고마 생략했다.

저녁은 한식 중 외국인들도 즐기는 불고기 백반을 뷔페식으로 차려줬더니 아주 맛나게들 먹었다.

후식으로 준비한 파인애플 망고 오렌지 수박에 과자나 케이크도 주는 대로 척척 접시를 비워내 신통하기만 하였다.

그래도 야식까지 피자헛에 전화주문해 한밤에는 피자를 대령시켰다.

밤하늘에는 별빛 초롱하고 초승달이 이쁘게 푸르건만 밖엔 얼씬도 안 하고 방에서 컴퓨터하고 만 친구 하는 요새 아이들.

네 친구가 모였으니 어찌 아니 즐거우랴, 한방에 들앉아 퉁탕 킬킬거리며 밤샘하다시피 놀더니,
이튿날 열 시나 되어 일어나 때맞춰 구워준 프렌치토스트는 입이 깔깔한지 본숭만숭한다.

집에 돌아가기 전 점심으로 끓여준 라면은 한 공기씩 말끔하게들 비웠다.

고모가 조카를 위해 성심성의껏 마련한 생일 이벤트는 여기까지....



할머니가 영어를 잘 구사하지 못해 오히려 민폐라고까지 하며 애들이 말렸다는데, 자녀들을 데리러 기어코 엄마 둘이 우리집에 왔다.

사랍학교라서인지 오나가나 열성 엄마들, 예까지 오는 데만 두 시간 너머 걸렸다는 엄마도 있다.

한국 전통 다기로 녹차를 대접하자 신기하다며 폰을 눌러 사진에 담아뒀다.

엄마들은 이구동성으로, 미혼의 고모가 조카를 맡아 내동 등하교 시키는 걸 봐왔기에 대단한 일을 한다며 학교에서도 칭찬 일색에 경탄 만발이란다.

사춘기의 청소년, 제 부모도 감당 버겁다 할 정도로 힘들게 하고 신경 곤두서게 만드는 시기다.

그런 녀석을 책임 맡아 안팎으로 건사하며 제 일하느라 하루도 편히 쉴 짬이란 게 없었으리라.

무엇보다 라이드가 가장 부담스러운 부분으로 집에서 파사데나에 있는 학교까지 차로 40분이 소요된다.

스쿨버스가 카버 하지 않는 지역이라 불가피하게 자가용 통학 방법뿐이다.

아침 등교 시간은 이르므로 출근 전에 다녀오지만 하교 시간은 근무 중인 한낮이라 우버 택시를 수소문해 봤다.

그러나 '제시간에 날마다 틀림없이'란 항목이 붙으니 도맡아 운전해 줄 사람은 도무지 구할 수 없었다.

대체 통학거리가 어느 정도나 되나? 구글링을 해봤다.

도보로는 일곱 시간 족히 걸리는 거리로 대중교통은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야 하므로 불편한 데다 길에서 허비하는 시간이 너무 많았다.

결국 고모가 근무하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야 하는데 트래픽에 걸리면 하루 서너 시간을 운전하며 길에 깔아놓게 된다.

자식일지라도 쉬운 일 아니라며 자녀 데리러 온 엄마들이 한결같이 놀라워하듯 과연 보통 일이 아니긴 했다.

남들로부터 그 말 듣고 보니 무척 힘들었겠구나, 새삼 느껴지며 그간 참으로 노고 많았다며 등 두드려주고 싶어진다.

일주일에 닷새 그 길을 하루 두 번 왕복해야 하니 웬만한 사람 같으면 애진작에 손을 들었으리라.

거기다 주말이면 거의 빠짐없는 액티비티며 봉사활동 기타 등등........

워낙이 심지가 깊고 매사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성격이기에 아무런 불평이나 군소리 없이 해낼 수 있었겠다.

그뿐인가, 학업성적과 교우관계도 눈여겨 살펴야 하는 데다 일생을 가르는 진로 문제도 고려해야 하는 주요 시기이다.

더해서 걷잡을 수 없는 질풍노도에 좌충우돌의 시기라는 청소년기다.

저를 믿고 한국에서 오빠가 마음 놓고 지내는데 책임에 한치도 소홀할 수 없거니와 방심하려야 할 수가 없다.

그러자니 인성교육을 위한 쓴소리 잔소리도 자주 하게 되는데 그나마 다행인 건 조카가 고모를 어려워한다는 점.

또래 아이들 성향과 기분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해 주면서 야단칠 때는 눈물 쏙 빠지게,
녀석을 반듯하게 가르치고 길들일 수 있는 건 현재 고모뿐이다.



중학교 삼 년은 뉴저지에서 우리가 데리고 있었으나 하이 스쿨 수준은 나로선 역부족이었다.

일찍이 두 아이들 키우며 겪어본 적 없으므로 손자의 이해 불능 사춘기도 솔직히 나로선 불감당이었다.

그 ​Guardian ​역할을 딸내미가 기꺼이 대신하는 셈이다.

"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탈무드의 이 구절처럼 누구든지 한 생명,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전 세계를 구하는 것이란 말은 맞다.

우리나라 단군 시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弘益人間 理化世界)처럼 우주의 모든 만물을 널리 이롭게 하는 참된 사람.

태어나 이 세상에 도움을 주는 존재가 되도록 이끄는데 일조하는 일만큼 보람찬 일이 또 어디 있으랴.

현재 있는 그 자리에서 자신이 맡은 일을 성실히 수행함이 인간 도리의 가장 기본이다.

그리하여 세상에 건강한 기운을 보태는 것이 바른 삶의 자세가 아니겠는가.

모든 부모가 이 한 가지만 유념하며 자녀를 키운다면 아이들 인성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반듯하련만.

대부분이 제 자식 남보다 좋은 위치에 올려놓으려는 데만 그저 혈안이 되어 교육현장을 무한경쟁터로 만들기 일쑤다.

개중에는 치졸스런 치맛바람 일으키며 저급한 편법까지 동원, 탄탄대로가 보장된 최상위권 학교에 밀어 넣으려는 시도조차 마다치 않는다.

좋은 의미에서 한국의 높은 교육열은 오늘의 발전된 국가를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서열화에 따른 반대급부의 피해 역시 간과해선 안될 터.

인간의 기본 욕구인 상승 욕구야 당연하다 하겠으나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과열된 욕구는 항용 문제의 불씨가 되곤 한다.

딸내미는 바른 삶의 본보기가 되도록 솔선수범하면서 특히 평소 생활화하던 채식 위주 현미 건강 식단도 성장기의 조카를 배려해 과감히 접었다.

그런데다 오히려 조카가 남긴 음식을 버리지 않으려 먹어치우다 보니 디톡스를 더 자주 해야 한다나.

가디언 1년 차, 4백 일이 넘도록 바짝 강행군을 해온 터라 이참에 나도 푹 휴식 좀 취하자,며 웃는 딸내미.

그럼에도 공치사는커녕 엄살이나 짜증 비슷한 거도 한 번 해본 적 없는 동생이라 한국의 오빠는 그저 대견하니 고맙기만 하다고... 2015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