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버야, 놀자

by 무량화

더위를 핑계로 방에 콕 틀어박혀 영화만 디립다 봤다. 보고 싶던 영화를 거의 다 찾아서 정말이지 원 없이 봤다. 최고의 영화로 꼽는 카사블랑카, 글루미 선데이, 미션, 죽은 시인의 사회, 킬링 필드, 로마의 휴일, 바그다드 카페, 양들의 침묵, 닥터 지바고, 시네마 천국, 사운드 어브 뮤직, 레옹에다 화양연화, 패왕별희, 마지막 황제 등도 다시 만나보았다.


새로 본 영화로는 더 노트북, 아이엠 샘, 인생은 아름다워, 맘마미아, 자전거 타는 소년, 아므르, 터부, 블랙, 빈센트,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 리멤버, 내 사랑 시베리아, 피아니스트, 오페라의 유령, 중국영화 집으로 가는 길이며 일본영화 두더지도 괜찮았고 한국영화 부러진 화살도 한참 여운에 잠기게 했다. 그러다 엊그제 마지막 사냥꾼을 보았다.


캐나다 북서부 로키산맥의 웅자와 광활한 설원 풍경만으로도 압도당하겠는데 주인공의 든든한 사냥터 동지인 시베리안 허스키는 또 얼마나 멋졌는지.. 개썰매를 타고 호수를 질러가다가 얼음 구덩이에 빠져 생사의 갈림에서 허우적일 때 개들이 되돌아오는 순간, 나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한편의 아름다운 자연 다큐멘터리 영상 같았던 그 영화 초반부에서다. 곰 사냥꾼이 강을 거슬러 오르던 중에 만난 비버는 인적을 전혀 겁내지 않고 유유자적 평화롭게 노닐었다. 파라다이스가 바로 거기였다.



그때 나의 기억회로는 한참을 뒷걸음질 쳐서 오래 전의 비버, 나의 비버에게로 달려갔다. 미국살이 초창기, 아파트에 살던 십수 년 전 여름이었다. 저물녘 뒤란 잔디밭 멀찍이에 낯선 동물이 나타났다. 경계심을 늦추지 않은 채 한 발짝씩 슬슬 다가오다 멈춰 서곤 했는데 토끼는 아니고 아무튼 이상하게 생긴 짐승이었다. 다람쥐이기엔 영 큰 것이 들고양이만 한데 난생처음 보는 동물이다.


가끔 만나는 너구리도 아니고 아포섬이라는 괴이쩍은 동물도 이 무렵쯤이면 등장하긴 하는데 쥐를 왕창 확대시킨 것처럼 끔찍하게 생긴 아포섬도 아닌 데다 약간은 귀여운 스컹크도 아니다. 여긴 더러 스컹크도 나타난다. 녀석이 울타리를 넘어와 어정거리면 특히 개가 펄펄 뛰며 짖고 난리법석을 핀다. 바로 그때 녀석의 반격, 비장의 무기로 한방을 쏘면 개는 그 냄새에 거의 혼절지경. 개를 살려내는 비방이 따로 있다는 걸 살짝 수의사한테 들었다. 바로 토마토즙을 짜먹이거나 없으면 토마토케첩을 먹이고 바르면 즉효란다.



그나저나 첨 보는 저게 도대체 뭔고? 풀을 뜯어먹으며 점점 시야 가까이 다가서는 동물. 암갈색 털에 오동통하니 하얀 앞니 두 개가 토끼처럼 튀어나왔다. 온 전신이 털부숭이인데 털이 없는 꼬리는 주걱처럼 납작하다. 그동안 봤던 영상물 중 동물의 세계를 뒤적거리는 머릿속이 분다워진다. 아메리카에서 서식하는 특이 동물로 물에서도 사는 동물은? 편편한 꼬리는 헤엄칠 때 노 역할을 하며 적이 나타나면 꼬리로 수면을 두드려 동료들에게 경계신호를 보낸다지. 그래, 너였구나, 비버! 뒷숲 너머에 개울이 흐르고 있으니 비버가 살만한 환경이다.



비버에 대한 추억.... 큰애가 두어 살 아기였을 적. 그러니까 오십여 년 전 얘기다. 술과 친구를 유별스레 좋아하는 남편이 어느 날 밤.(그땐 통금이 있었다) 일송정 푸른 솔~ 을 목청껏 부르며 대문을 호기롭게 두드렸다.(대빵 취하면 부르는 노래가 선구자) 꼭지 돌기 바로 직전까지 마셔대고는 그래도 모자라 친구들을 대동하고 2차 술판을 벌일 깜냥이다. 그러자면 으레 사 온 술은 동이 나게 마련이며 멸치 대가리까지 안주로 작살내다가 결국엔 집에서 담근 매실주에 포도주 진달래술까지 쥐어짜 마시고는 이방 저 방에 큰大자로 다들 널브러지는데 이튿날 그래도 출근들은 한다고 부시시 일어나더라는....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번번이 우리집이 그들 술꾼들의 마지막 종점이자 편편한 아지트였다. 거의가 셋방을 살 때인데 당시 우리는 제법 큰집을 지니고 있었다. 시어른이 진작에 집 장만을 해준 덕이라면 덕에 늘 술친구들 뒤치다꺼리를 해야 했다. 하여지간, 대구 유흥가 주변의 통금 직전 시각. 취객을 대상으로 완구를 파는 리어카 행상이 떨이라며 선심 쓰듯 싸게 줬다는 봉제완구 그것도 희한하게 생긴 이상스레 큰 동물을 선물이라면서 자는 아이 품에 안겨줬는데.... 곰도 아니고 토깽이도 아닌 난생처음 보는 이 뭣꼬?


귀엽지도 않은 게 크기만 크고 못 생긴 데다 잿빛의 꼬리가 유난히 큰 동물. 나중에 텔레비전 프로 동물의 세계를 통해 그게 비버임을 알았다. 한동안 아이는 좋아라 하며 곧잘 녀석을 껴안고 잠들곤 했다. 8년 터울 동생이 생기자 뭐든 기꺼이 동생에게 양보를 했는데 비버도 마찬가지였다. 딸내미가 어지간히 자라자 비버보다는 백설공주를 한결 더 좋아하게 됐다. 장난감 상자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하릴없이 버림받은 비버. 그러다 가까스로 쓰임을 받게 됐는데.... 낮잠 잘 때 베개감이었다. 베개 대용으로 너끈이 쓰일 만큼 길둥근 몸체에 넙죽한 꼬리를 가진 비버는 군데군데 실밥이 터질 정도로 아주 오래 우리 곁에 머물렀다.


미국에 와서 호수가 있는 곳을 지날 때면 슬그머니 비버를 찾곤 했지만 한 번도 눈에 뜨인 적이 없는 비버였다. 어느 해 여름, 호수가 많은 뉴튼 수도원에서 열리는 청소년 캠프에 갔을 적에 멀찍이서 그것도 망원경으로 처음 비버를 관찰했다. 잘 얼지 않는 고급모피를 입은 데다 멋진 향낭까지 지닌 탓에 사냥꾼들의 덫에 걸려 숫자가 줄어든다는 비버다. 강가나 호수에 나뭇가지로 댐을 만들어 그 사이에다 수중 집을 짓고는 안식처 겸 먹이 저장고 삼아 지내므로 우리 눈에 잘 띄지 않는 동물이다. 그 비버를 그날 저녁 뜻밖에도 목전에서 재차 상봉하게 된 것.


물속에 나무와 흙으로 둑과 집을 만들고 사는 동물인 비버는 댐을 쌓는데 일급 건축기사다. 물속에 살지만 어류를 먹는 게 아니라 풀을 먹는 초식동물. 또한 비버는 여러가지 미덕을 지닌 동물이다. 우두머리가 따로 없는데도 각자가 스스로 할 일을 알아서 결정하고 성실히 일하는가 하면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다.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 잘 협력할 뿐 아니라 특히 둑을 쌓을 때 다른 녀석이 갖다 놓은 나뭇가지를 망가 뜨리거나 옮겨 놓지 않는다고 한다. 캐나다를 상징하는 동물인가 하면 칼텍 등 미국 여러 대학의 마스코트다.


얼른 사진기를 찾았다. 그리곤 디카에 담았으나 급히 서둘다가 흔들리고 말았다. 비버는 불빛에 흠칫하더니 잽싸게 숲 속으로 미끄러지듯 사라져 버렸다. 그 아파트를 떠나 다른 동네 주택으로 이사할 때까지 저물녘이면 행여나, 하면서 내 시선은 자주 뒤란 쪽을 서성거렸다. 그러나 우연히 조우한 그때가 비버와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고 말았다. 사막지대인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이후야 당연 비버를 조우한 적이 없다. 그리고 모처럼 영화 속에서 가찹게 만나 본 비버. 비버야~넘 넘나 반가워.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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