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 핀 꽃.

by 무량화


이십여 년 전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읽었다.

냉전시대였던 당시 한반도 정세와 맞물려 대중적 인기를 크게 얻었던 책으로 장기 베스트셀러였으며 영화화되기도 한 김진명의 소설이다.

몇 년 전 부칸에서까지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했다는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다.

교황청이 정면 비판한 <다빈치 코드>가 그러하듯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허구의 이미지일 따름인 것이다.

“문학적으로 가공되고 정치적으로 치장된 영웅이 아닌, 학자 이휘소의 명예를 복원하고 싶었습니다.”

<이휘소 평전>을 쓴 강주상 교수의 말이다.




문학적 상상력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없는 삶의 비의성을 꿰뚫고 진실의 꽃을 피워낸다는 측면에서
순기능을 지닌다.

하지만 그 상상력이 왜곡됐을 경우에는 삶을 모독하는 역기능을 낳게 된다.

비운의 교통사고로 42세에 요절한 물리학자 이휘소(1935∼1977)의 일생은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모독된 케이스에 속한다.

1989년에 나온 ‘핵물리학자 이휘소’와 1993년에 출간된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는 대표적인 예다.

워낙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 때문에 이휘소에 대한 소문과 억측들이 무수히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오히려 그의 학문적인 업적은 그늘에 가려지는 경향이 있다.

때 이른, 그리고 극적인 죽음으로 인해 그의 삶이 베일에 가려지거나 왜곡돼왔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 책은 그를 가까이에서 지켜봐 온 제자가 쓴 ‘가장 사실적인 기록’이라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책이다.

그는 사실 있는 그대로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였고 노벨상에 근접했던 최초의 한국인 과학자였다.

이것이 그를 둘러싼 진실의 전부다.


김진명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의 모델이 바로 이휘소였다.

소설에서 이휘소는 박정희를 도와 한국의 핵개발에 앞장섰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인물로 그려진다.

얼마 전 이휘소의 유일한 한국인 제자 강주상 고려대 물리학과 교수가 진실을 알리고자 `이휘소 평전`을 냈다.

평전을 보면 이휘소가 핵무기 개발과 관련됐다는 이야기는 일종의 소설적 허구임을 실례를 들며 증언한다.

우선 이휘소는 핵물리학자가 아닌 소립자 물리학자다.

그의 전공 분야는 원자탄을 만드는 데 직접 대단한 도움이 되는 분야가 아니라, "저절로 대칭 깨짐(spontaneous symmetry breaking)"이나 게이지 이론(gauge theory), C-쿼크 등을 연구하는 핵과는 관련없는 입자 물리학자였다.

이처럼 소립자 물리학은 원자핵보다 작은 우주의 기본입자들 간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특히 이박사는 핵무기 개발에 매우 비판적이었으며 특히 독재 체재하의 개도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에 크게 우려했던 학자적 양심이 분명했던 사람이다.


평화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생각과 행동에 공감한 그는 전쟁과 핵무기개발에 절대 반대 입장을 취한 평화주의자였다.

미립자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 살다 간 그, 사람을 위한 과학자가 되고자 했던 그는 노벨상을 목전에 둘만치 세계가 먼저 알아주었던 사람이다.


강주상 교수가 쓴 "이휘소 평전’은 문학적 허구의 그늘에 가려진 이휘소의 일생을 지인들의 증언을 토대로 되살려놓고 있다.

이휘소는 20세에 도미, 30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 물리학과 정교수에 올랐으며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을 역임한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였다.

1960년대 초 펜실베이니아 고등연구원 시절, 동료들이 붙여준 그의 별명은 ‘팬티가 썩은 사람’이었다.

저녁 식사나 술자리 같은 사적 모임에 일절 참석하지 않고 밤낮없이 연구실에만 붙어 있어 생긴 별명이었다.

이처럼 사실에 기초한 최초의 평전을 강주상이 썼다는 의미는 남다르다.

이휘소가 강주상의 미국 스토니브룩 대학 시절 박사학위 논문 지도교수였다는 친분 외에도 같은 물리학자로서 이휘소의 업적을 일반인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1976년 노벨상 수상자인 리히터와 팅, 79년 수상자인 와인버그와 살람, 99년의 토프트와 벨트만, 2004년 그로스, 윌첵 등의 영광이 이휘소 박사의 연구 결과에 직간접적으로 빚을 지고 있음도 논증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저자가 공을 들인 부분은 문학적 상상력에 의해 덧칠된 이휘소의 맨 얼굴이었다.


이휘소 박사는 20세(1955년)에 도미, 30세에 펜실베이니아대학 물리학과 정교수에 올랐으며

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학부장 등을 거쳐 42세로 요절할 때까지 세계 물리학계를 이끈 과학자로,

그는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주인공으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

강 교수는 이휘소 박사가 스토니브룩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이듬해인 1967년 그 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6년간 그의 지도 하에 수학한 사실상 국내 유일의 제자다.

강 교수는 어설픈 애국주의에 얹혀 독재자의 핵개발에 협조하다 권력 음모에 의해 희생된 것처럼 그려진 ‘비운의 영웅 이휘소’가 아니다.


세계 물리학계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 올곧은 학자로서의 이휘소를 알리기 위해서 책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그릇된 사실에 근거해 그를 영웅시하지 않더라도, 그는 삶과 학문적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영웅입니다.”

한국이 배출한 세계 최고의 이론물리학자, 이휘소.

이휘소의 유족과 지인들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소설 속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이휘소는 이미 학문적 업적으로 세계적 명예를 얻었다.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닌 상상력이 발휘된 허구의 이미지는 그에게 오히려 흠결만 될 뿐이다.

미화로 각색하고 허구를 덧칠하지 않아도 이휘소의 생애는 충분히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세계 정상급의 물리학자로 과학사에 큰 획을 그었고, 한국인의 우수성을 세계에 과시했으며
한국 물리학계의 발전에 도움을 준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다.

이것이 진실이며 바로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의사로,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위할 줄 아는 가정에서 태난 그는 호기심 많은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엄마가 죽는다는 게 싫어 죽지 않는 약을 만들겠다던, 사람을 위한 과학자가 되고자 했던 이휘소.


미국 일리노이주에 소재한 페르미 연구소,


약칭으로 페르미랩(Fermilab)으로 불리는 이 연구소 공식 명칭은 페르미국립가속기연구소다.


1500여 명의 과학자가 적을 두고 있는 세계 최고 물리학 연구소다.

이박사는 1977년 6월 16일 오후 1시 페르미 연구소 자문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콜로라도로 가던 중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중국계 부인 심만청과 두 자녀도 함께 타고 있었으나 그들은 다행히 경상이었다.

연구소에서는 1977년 한 명의 한국인 과학자 죽음에 이곳의 성조기를 조기로 게양하게 했다.

미국에서는 벤저민 리로 불리는 학자였다.


페르미랩 이론물리학 연구부장이었던. 이휘소 박사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연구소가 그를 추모하며 조기를 내건 것이었다.



영결식에서 윌슨 페르미연구소장은 이렇게 고인을 추모했다.

“인류 문명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기여가 쌓여 고도로 발달했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살아가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휘소는 인류문명 발전에 특별한 공헌을 했고, 우리는 그의 공적을 기립니다.

이휘소가 다빈치나 아인슈타인과 같은 인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은 특별한 영감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하였습니다.”

이휘소의 생애는 소설에 의해 미화되고 허구로 덧칠하지 않아도 충분히 극적이고 아름다웠다.


그러나 덧없다, 못다 핀 채 허망히 스러진 천재이기 이전 한 인간의 삶을 돌이켜보니....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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