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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4. 2024

규장각을 보았나요?

비원

교과서에 금아 선생의 <비원>이란 수필이 실렸었다. 꾀꼬리 소리를 들으러 비 오는 오월, 비원에 가보겠다는 깨끗한 미문이었다.  왕실 가족의 후원으로 궁원(宮苑), 또는 창덕궁 높은 담장 안 금지된 구역이라서 금원(禁苑)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비원(秘苑)은 일제가 붙인 이름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요사이 정식 명칭이 후원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윽하게 이어지는 깊은 숲과 비밀스러이 안배된 정자를 보나따나 秘苑이 더 어울리는 곳.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부끄러운 역사를 개명으로 뭉개버리기 전 국력을 키우는데 진력할 일이다.


오래전부터 벼르던 비원을 보러 갔다. 일찍이 금아선생의 맑은 문채가 비원에 대한 환상을 키워가게 했던 것이리라. 창덕궁 안에 조성된 아름답기로 소문난 그 정원을 드디어 오월에 찾았다. 자연 그대로의 지세를 최대한 살려서 조성, 지형지물이 서로 조화 이루는 정원이라 무척 운치 있다고 알려진 원이다.



창덕궁은 본 궁인 경복궁보다 가장 오랜 기간 왕이 거처한 궁궐이다. 궐내에 꾸며놓은 왕가의 산책지이자 잔치 장소로도 쓰인 비원은 너비가 무려 십만삼천여 평에 이른다나. 금수저를 물고 나온 왕족 역시 파란만장한 삶, 연산군이 기생들을 불러들여 유락을 즐긴 장소이기도 한 원. 허나 그의 최후는 더없이 비참했다. 금지된 장소를 연상시키는 금원이든 뒤꼍에 만든 정원을 뜻하는 후원이든 왜 굳이 비원의 상징성을 이름에 고자 할까.

하여지간, 창덕궁의 후원(後苑)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이라는 평가받고 있는 곳이다. 비원 그중에서도 부용지 주변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연못 가운데에다 작은 인공섬을 만들어 수형 우아한 소나무를 심어놓았다. 사각형 연못에 둥근 섬을 배치한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동양 사상이 담겨있다는데. 활짝 핀 연꽃을 뜻하는 부용, 부용지에 배를 띄우고 군신 간의 연회도 베풀어졌다는 곳. 연못 속에 두 발 담근 열십(+) 자 모양의 부용정은 정교한 목조 공예의 진수를 보여주며 남쪽에 서있다. 동쪽에는 영화당(暎花堂)이라는 아담한 건물이 화강암 장대석 위에 자리하였다.

정조 임금 이래로 과거를 보던 장소라 한다. 또한 과거에 급제한 유생들에게 축하연을 베풀던 곳이었다.

영화당
규장각이 있는 주합루

부용지 전면 중앙에 2층으로 웅장하게 솟은 전각인 주합루(宙合樓)는 경사진 언덕 위에 서있다. 1층은 왕실도서관인 규장각이고 누마루로 된 2층 주합루는 열람실이지만 왕실 학문 연구기관으로 설립됐다. 창덕궁 후원에서 의외로 규장각을 만나다니. 말로만 듣던 규장각이 구중궁궐 깊디깊은 여기 있었다니....



규장각이 있는 주합루, 주합은 우주와 하나 된다는 심오한 뜻이 담겨있다 한다. 정조 원년에 만들어 역대 임금의 친필 글씨와 유교(遺敎), 보감(寶鑑) 등을 보관 관리하던 도서관은 일층에 자리했다. 왕실 도서관이었으나 실제로는 유능한 인재들을 모아 새로운 책도 펴냈고 여러 개혁 정책을 만들어 나갔다고 한다.  



사방이 열린 누마루인 주합루는 정조의 개혁 정치를 위한 중추적 역할을 한 곳. 곳에서 정조는 유생들과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했으며 정사를 토론하는 등 두루 인재를 등용하여 왕정체제를 강화시켜 나갔다. 한편으론 진정한 위민정치를 실현하고자  고심하며 밤잠을 설쳤다.  



주합루는 정조 대의 정책 연구실이자 학문 수련장인 바, 조선 후기 르네상스 시대를 열어가며 학예가 꽃 피어났던 산실이다. 많은 책들이 정조의 주관하에 편찬 간행되었는데 그중 외적 격퇴에 공이 큰 인물들의 전기 편찬에도 힘써 <忠武公 전서>를 비롯해 <김충장유사>등을 펴냈다.



그 후 줄곧 궁원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휴식공간이 아니라 활쏘기 터, 나아가 군사훈련장으로도 쓰이던 다목적 공간으로 변모됐다. 영조에 뒤이어 25세 때 왕위에 올라 탕평책을 실시하고 수원 화성을 축조한 군주, 정조. 정조는 세손(世孫)으로 있을 때부터 정당(貞堂)이라는 서고(書庫)를 지어 도서 수집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세운 규장각은 그러나 조선말 순조 때는 조망권이 뛰어난 장소이다 보니 일본 관리들의 접대실로 사용되기까지 했다. 예나이제나 무능한 위정자를 만나면 국력이 부실해지고, 종국엔 별수 없이 나라 전체가 참담한 국치를 당할밖에. 광복 이후까지 일부 남아 있던 도서들은 전수 현 서울대 규장각으로 이관하였다.

주합루 취병(생울타리)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를 부모로 둔 가여운 사람으로, 아버지가 뒤주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하기도 했던 정조 임금이다. 한도 많은 데다 재위 25년 동안 아버지를 사지로 몰아넣은 노론에 둘러싸인 채 정사를 돌보느라 어느 군주보다 고단했던 왕. 성 밖 행차를 자주 가졌으며 왕릉 참배를 구실로 도성 밖에 나가서 백성들과 만나 민초들의 민원을 직접 듣는 기회로 삼았던 현군이다.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란 호를 만년에 새로 지은 정조. 하늘에 떠 있는 달이 만 개의 냇물을 비추듯이 자신의 다스림이 일부 계층이 아닌 만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과 의지가 담긴 호다. 규장각 유생의 의문사로 시작되는 <영원한 제국>이란 영화에서 보다시피 정조는 고질인 당쟁을 아우르는 명월 같은 현군을 꿈꿨건만.



규장각 계단으로 향하면 왕이 드나들던 어수문이 중앙에 서있고 양옆의 좁은 문은 신하들이 드나들던 문. 어수문(魚水門)은 피차 불가분의 관계인 물과 물고기(水魚之交)처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뜻인 바, 통치자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이 담긴 문이라 한다. 어수문 양켠에는 대나무를 심어 내부가 훤히 드러나는 걸 막아주는 가림막 역할과 공간을 분할하는 담장 기능을 맡겼다. 푸른 병풍이라 이름한 이 전통 울타리는 취병(翠屛), 사철나무나 탱자나무 둘러친 담을 우리는 생울타리라 칭한다.



정조가 규장각을 설치한 목적은 단순히 역대 국왕의 어제와 어필을 보관하는 일뿐만이 아니었다.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외척이나 환관(宦官) 들의 횡포를 누르기 위한 현실적인 문제 해결방안을 학문에서 찾아야 한다고 판단한 정조임금. 그에따라 정책적으로 도서를 수집해 보존하고 보다 많은 책을 간행해 백성을 계몽하고자 함이었다.



현시도 마찬가지다. 깨어있는 국민, 민도 높은 시민이 되려면 폭넓은 독서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책을 통해 사회에서 유통되는 사상, 가치관, 신념, 정의 등의 의미를 비판할 수 있는 안목을 기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횡행하는 강성 구호나 현란한 언변에 뇌화부동하지 않을 수 있는 주관 확고한 자아 정체성을 키우기 위해서라면. 대중의 무지도 무섭지만 특히 깊은 사유 없이 허투루 내뱉는 지도층의 말은 사회에 중차대한 해악을 끼치지 않던가. 일찍이 이 모두를 간파한 현군 정조다. 그가 일군 규장각 서쪽의 서향각에는 역대 임금의 초상화가 있다는데 주합루는 출입제한 구역이라 들어갈 수 없었다. 그 앞 부용지 웃자란 연잎만 무심히 나붓거리는 오후, 비원은 사위에 적요감만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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