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 데저트 지역의 불볕, 염제의 그 횡포는 잔인스럴 정도다.
생명체라곤 전갈이나 살아낼까? 허옇게 바랜 텀블링 트리만 굴러다닌다.
하굣길, 하이웨이 건널목에서 대기 신호를 만나 멈춰 섰다.
초록불 기다리며 서있자니 정수리에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이 찌르듯 따가웠다.
직사광선을 피하려고 신호대 기둥이 만들어 놓은 기다란 그늘로 슬쩍 숨어들었다.
잠시나마 볕막이 역할을 한 신호대 그늘에 의지해 있다가 신호 바뀌자 얼른 길을 건넜다.
집을 향해 걷는 도중, 여름 내내 기승부린 무더위 속에서 얻은 각성이랄까 자기 성찰의 경험을 다시금 되새겨 보았다.
이번 여름은 정말 무지막지 더웠다.
불가마같이 대지는 확확 달아올랐다.
폭염주의보가 자주 떴다.
숨이 턱 막히도록 세 자릿수 넘는 온도계(화씨 /℉)가 한 달 넘게 줄곧 이어졌다.
거기다 건조지역에 느닷없이 습도까지 끼어들었다.
강물은 바짝 졸아들어 테두리에 염분 띠 허옇게 둘렀다.
별로 더위를 타지 않는 체질임에도 절레절레 고개 흔들도록 만들 만큼, 생애 최고로 볶아치듯 뜨거운 여름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상 유난히 무더운 대구 분지의 찜통더위는 한국에서 다들 알아준다.
대구서 이삼십 대를 지냈는데 시원한 한옥집이어서인지 선풍기를 별로 틀지 않고 살았다.
정 더우면 대청마루에 나와 설렁설렁 부채질만 해도 더위가 가셨다.
부산에서 살 때는 해양성기후 지역이라서인지 더위라는 걸 거의 못 느끼고 지냈다.
지방층이 얇아 추위는 몹시 타지만 더위 따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던 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몇 해째 여름을 지냈는데 이번 같은 무더위는 처음 겪었다.
한낮 폭염 아래 나서지 않고 그늘에 들면 별로 더운 줄 모르고 지낼 수 있다 자랑한 켈리였다.
유례없이 뜨거웠던 올해는 에어컨 풀가동에다 워터 쿨러까지 켜고 그래도 부족해 선풍기 바람을 보탰다.
우리야 과학문명의 산물들로 요량껏 더위를 피한다지만 폭염에 고스란히 노출된 뜰의 식물들은?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염제의 폭거에 웬만한 초목은 속절없이 누렇게 타들어갔다.
타이머대로 작동하는 스프링쿨러에만 의존해서는 그들의 갈급증을 달랠 수 없어 수시로 물을 공급해 주었다.
그럼에도 뜨락 장미 네댓 포기가 불볕 견디다 못해 고사해 버렸다.
제법 큰 복숭아나무와 사이프러스 나무조차 비실거리다 영영 가버리고 말았다.
극한 체험하기라면 모를까 우린 그 불볕에 단 오분도 가만히 서서 견디기 힘들다,
붙박이로 속절없이 서있어야 하는 수목들은 불그레 타들어가며 바싹 말라가는 걸 속수무책 그냥 바라만 봤다.
식물뿐만이 아니다.
한낮 외출은 감히 엄두도 못 내고 두문불출 칩거를 이어가며 한없는 무기력증에 빠져 지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몸은 묵지근하면서도 부기까지 생기며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만사 의욕도 생기지 않고 입맛 없어져 무슨 병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누구나 겪는 온열 증상이었다.
워낙 더워 물을 자주 그것도 많이 마시다 보니 나트륨 농도가 낮아져 체액 균형이 깨질 만도 하였다.
여름내 시난고난 폭염에 시달리다 문득, 아 그래서였구나~ 오래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태껏, 남 사정이나 처한 형편 또는 입장을 잘 모르면서 내 잣대로만 판단하고 가벼이 비웃었던
그간의 오만불손을 자책하며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비로소 역지사지란 말 절절하게 체감되면서 그제서야 아프리카나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들, 속 터질 정도의 느려터짐과 게으름이 백번 이해됐다.
찌는듯한 염천 당해보니 수긍이 되고도 남는다.
날씨는 사람들 심리에 영향을 끼칠 뿐 아니라 기질 자체를 변화시킨다.
살아남기 위하여 자신이 속한 지역의 자연환경에 맞도록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새 스스로 심신을 적응시켜 둔 터.
숨 막히게 더울 때 많이 움직이게 되면 심장 활동이 활발해져 체온이 상승한다.
체내에서 열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사량 줄여야 하니 여름철 저절로 식욕이 감퇴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열사병으로 쓰러지지 않으려면 가급적 체온을 낮춰줘야 하므로,
더운 지방 사람들은 의식을 이완시키고 되도록이면 덜 움직이고 적게 먹어야만 그나마 명대로 산다.
그렇지 않으면 계속되는 무더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결국 생존 자체가 위협당하고 만다.
따라서 타고난 천성처럼 몸에 밴 게으름뱅이가 된다.
느긋하니 천하태평, 적극성을 보이지 않는 굼뜬 행동을 보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더운데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점, 필수 생존방식으로 본능에 가까우면서도 원초적인 자기 방어기제라고 볼 수 있겠다.
고로 그들에게 바지런 떨며 빠리빠리하게 활동하길 주문하는 건 무리다.
무더운 기후는 일상의 모든 속도를 기운 없어 보일 정도로 느리고도 축 처지게 만든다.
그러나 빨리빨리에 길들은 우리로서는 그들 생활태도가 미련스레 아둔하고 대책 없이 맥 빠져 보인다.
시에스타(Siesta)가 있는 몇몇 나라를 여행하며
'이러니 가난 못 벗고 낙후될밖에.'속단했던 자신이 거듭 무참스러워진다.
시에스타 때는 상점과 관공서도 문을 닫는다.
무더위 때문에 일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 시간, 낮잠으로 기력과 원기를 회복시킨 다음 일하는 게 백번 나은 현명한 처사 맞다.
그럼에도 개미와 베짱이 우화를 철석같이 믿으면서 근면을 미덕으로 여기며 살아온 우리다.
시간은 금이란 말에 익숙해 있었던 우리는 무엇에 집단 최면이라도 걸렸던 걸까.
아니면 봄 여름 가을 겨울 뚜렷한 지역에 사는 덕분이었을까.
하긴 근면이란 영어 단어 ‘Industry’는 산업을 의미하기도 하니 모든 게 설명되고도 남는 셈이다.
올여름 혹서 덕에 열대지방 체험하며 역지사지, 이 나이 되도록 여태 이해하지 못했던 점에 대한 깨우침과 가르침 받았다.
뜨락 화목 몇 그루를 폭염이 앗아갔으니 오지게 탓을 해야겠지만 그 덕에 얻은 것도 있으므로 피장파장 비긴 셈인가.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