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으윽~추버라!! 소리가 절로 터지지 뭡니까.
집에서 두어 시간 거리인데 거긴 완전 딴 세상이더라고요.
백 몇십 년 만의 혹서라더니 요 며칠 폭염이 장난 아니었잖아요.
세 자릿숫자 기온까지는 용서가 되는데 건조한 사막기후대에 희한하게 습도가 높으니 열대야현상까지 생기구요.
잠 못 이루는 캘리의 여름밤, 그 바람에 미련스러운 잠퉁이도 잠을 설쳐야 했습니다.
110도(화씨)를 가리키는 수은주를 보고 길을 떠나 395번 도로를 타고 북상할 때만 해도 파란 하늘에 폭염 기세 좋게 쨍쨍했지요.
거칠 것 없이 쭉 뻗은 도로는 질주본능을 자극하며 지평선 끄트머리에 소실점을 찍었습니다.
두둥실 흘러가는 흰구름 따라 마음도 깃털마냥 가벼이 날아오르더군요.
오웬스밸리를 지날 무렵까지도 멀쩡하던 하늘이 점점 잿빛으로 변해가며 날씨가 심상치 않더라구요.
시에라네바다 연봉 위 어딘가에는 이미 소낙비가 뭉티기로 퍼붓고 있었습니다.
아무렴, 비를 좍좍 맞아도 괜찮다마다. 한바탕 폭우라도 시원스럽게 쏟아져보렴.
Lone Pine에서 꺾어 들어 Alabama Hills을 우측으로 스친 다음 Whitney Portal로 들어서는 들머리.
아무래도 비가 오기 전에 점심부터 먹기로 하고 Whitney Portal Rd 좌측의 론파인 캠프그라운드로 접어들었더랍니다.
멀찌감치 올려다보이는 휘트니봉 가렸다 열었다 하며 비구름 자욱하고 뇌성소리도 가끔씩 들렸지요.
사나운 일기에도 몇몇 자리 잡은 텐트는 강풍에 심하게 요동질 쳤습니다.
골짜기를 타고 몰아치는 바람은 설한풍처럼 매서운 데다 간간 듣는 빗방울은 오싹 한기를 느끼게 하더군요.
콸콸 여울지는 계류는 급하게 소용돌이치며 디립다 내달리는 통에 발을 담글 수도 없었구요.
거센 바람 때문에 두꺼운 무쇠로 된 Bear Box를 열고 그 안에서 휴대용 가스렌지 불을 올려 스테이크를 구워야 했어요.
너무 추워 후드재킷 바짝 여민채 음식은 먹는 둥 마는 둥, 급히 물을 끓여 컵라면에 부었지요.
몽블랑 정상에서도 신라면을 판다던데 역시 추울 땐 따뜻한 국물로 속을 훈훈하게 덥혀주는 게 최고더군요.
라면국물을 훌훌 마시고 나니 금방 전신으로 열기가 확 차오르데요.
바로 옆에 있는 집채만 한 바위에 기어올라가 열도 식힐 겸 큰 대자로 누워 회색 구름장 바라보니 아아~ 좋다 읊조려지데요.
저 아래 급류 치달리는 소리, 물가에 선 나무에서는 새소리,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더라구요.
천국이 달리 천국인가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이 순간이 바로 천상낙원 누리는 신선놀음인 거지요.
비 쏟아지기 전에 가까운 트레일을 걷기로 했습니다.
안내판 글을 훌어보니 이 길은 휘트니포탈이 생기기 전의 옛길로, 휘트니등반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네요.
기분만은 제법 본격 트레킹이라도 하듯 산자락을 밟으며 저 멀리 휘트니를 마주 바라보면서 걸었지요.
멍이 앞세우고 팔 자유로이 휘두르며 뚜벅뚜벅요.
요런 비암을 조심하라는 경고문을 지나자마자 선인장 무더기 아래 땅굴이 보여 냅다 뺑소니를 쳤네요.ㅎ
산길엔 키 작은 잡목 엎드려 있었고 메마른 산야에서 자라는 야생화가 하얗게 피어 있더군요.
만년설 흘러내리는 준수한 바위산이 바짝 다가오는 성싶었는데 또다시 빗방울 흩뿌렸습니다.
번개가 번쩍 비치더니 멀리서 천둥소리 우르릉거렸습니다.
더 이상 욕심은 무리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온길 되짚어 내려오는데 이번엔 맞은편 풍광이 우리를 사로잡더라구요.
비현실적으로 몽롱히 떠있는 섬 같은 봉우리들은 앨라배마힐로 다른 각도에서 그렇게 바라보니 영 낯설더군요.
신기하네~ 소리를 연발하며 이게 웬 떡인가 싶어 눈높이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들을 연거푸 찍어댔네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비가 촤르륵 쏟아지더군요. 그러나 세차 수준의 비가 아니라 얼룩만 지게 만들고 그치는 비.
집에 돌아오니 불가마 같은 더위가 여전 진을 친 채로, 100도 아래 기온으로는 떨어질 기미 안 보이데요.
그래도 하루 혹서 탈출 덕에 제아무리 기고만장인 더위일지라도 어쩐지 만만히 여겨집디다.
비구름에 쫓겨 달아나다시피 돌아와서는 산 대신 바다를 불러와 영화 한 편 때렸지요.
어밴던드(Abandoned, 2015)는 119일간을 바다에서 표류한 실화영화랍니다.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