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화사 九華樓 앞 연당

by 무량화
제주도기념물 13호로 지정된 법화사터. 이 계단과 초석들이 그대로 남아있다

동문로터리를 지나다 소공원에 활짝 피어난 두 그루 배롱나무꽃을 보았다.

수령이 얼마 안 된 나무라 꽃이 만개했어도 꽃숭어리는 허술하고도 빈약했다,

배롱나무꽃이라면 법화사가 최고로 볼만하지.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씨임에도 길을 나섰다.

아니, 찌는듯한 폭염이라면 섣불리 나설 엄두도 못 냈으리라.

근자 들어 연일 극한 혹서가 이어지기에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한낮의 외출은 용기가 필요할 정도이니까.

해마다 염제 기승부리는 한여름이면 진분홍 꽃다발로 연못가에 빙 둘러 섰던 법화사 배롱나무꽃.

그러나 목백일홍 꽃봉오리는 단단한 채 설핏이라도 꽃 자취 전혀 찾을 길이 없었다.

하마 언제 피려는지 기약조차 아득하나 기어코 염제에 맞서 이 여름 황홀히 불타오르고야 말 터다.

그때는 어쩌면 월말 경 쯤이 아닐까.

잔디밭을 질러 대웅전으로 향하던 도중 뜻밖에도 네 잎 클로버와 조우했다.

행운을 상징하는 네 잎 클로버다.

이번에는 허리 낮추고 본격적으로 클로버 밭을 뒤져 또 하나 네 잎짜리를 만났다.

목백일홍에 대한 기대는 까무룩 잊어버렸다.



하긴 그 꽃만이 아니라도 너울거리는 연잎 사이 오연한 자태로 연화 피어나 삼천 평 드넓은 구품연지에 연향 은은히 번지는 가람이 법화사다.

구품연지 마주 지켜보며 외외하게 서있는 이층 누각 구화루(九華樓).

질박하면서도 당당하게 여백의 미를 보여준 봉정사 만세루 누각, 소백산 아우르는 풍경이 압권인 부석사 안양루 누각 생각나게 하는 눈맛 그윽한 구화루다

단청 입히지 않아 아취 고담스러운 이층 누각 구화루 기단에 걸터앉아 백련을 그윽이 바라보았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 구품연지(九品蓮池)는 이생이 끝나면 공덕에 따라 아홉 등급의 자리에 각기 배치되는데 그중 최상인 극락세계는 연화대.

쌓아놓은 공덕 미미할지라도 설화 속 파 한 뿌리 노파의 박절함만은 부디 닮지 않기를.

지옥으로 떨어져 가는 탐욕스런 노파를 천국으로 이끌어 줄 파 한 뿌리, 지옥불에서 허우적대던 수인들이 노파 발목을 잡고 늘어지자 매몰차게 떨치는 순간 파줄기가 툭 끊어졌다는.....

불교 대중법회 때 법문 중에 들었는지, 가톨릭 미사 시 강론 때 들은 설화인지 뒤엉킨 기억의 갈피.

구품연지는 불교사찰 경내에 있는 연꽃 피는 못을 이르는 말인 줄 알았는데, 해설문을 읽어보니 불상 기단 혹은 탑의 기단에 연꽃무늬를 새겨넣는 뜻도 마찬가지로 구품연지란다.

구화루(九華樓) 앞 약수터인 법화수는 쉬지 않고 솟아오르는 용천수로 흘러 흘러 연당을 채워왔고.



먼저 대웅전에 예를 올리고 뜰로 나서니 후덥지근한 우기임에도 대숲 바람 청렬하고 해송 그늘 서늘했다.

법화사는 고려시대부터 제주의 대표적인 사찰로 조선중기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부지만도 약 4만 평에 달할 정도로 당시 규모가 매우 큰 절로 고려조엔 제주 3대 사찰 중 하나였다.

조선 초기만 해도 법화사에 배속된 노비가 280명이었을 정도로 큰 절이었으나 18세기에 제주목사 이형상이 제주도의 대찰 세 곳을 불태워 없애므로 완전히 폐사가 됐다.

이후 잊혀진 법화사는 1986년 대웅전 1채 등 부속건물을 복원하였다.

백련당, 회인당, 구화루 등은 근래에 중건되었다.

고려말 혜일선사(慧日禪師)가 법화사에 들렀다 남긴 시가 '신동국여지승람'에 남아있는 제주 법화사.

그의 싯구 중 ‘법화암반물화유(法華庵畔物華幽) /예죽휘송독자유(曳竹揮松獨自遊)...

여기 나오는 반(畔)은 물가를 뜻하며 이로 미루어 연지가 있었음이 유추되며, 경내에 송죽 유독 청청함도 다 까닭이 있었던 듯.

혜일선사는 제주 전역을 두루 다니며 수행을 하면서 인연 따라 여러 편의 시를 남긴 시승(詩僧)이기도 하다.

특히 그는 산방산 중턱 해발 150미터에 있는 해식동굴인 자연 석굴 안에 산방굴사를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연지에는 백련, 홍련, 수련, 부레옥잠 연보라꽃도 연연히 피어나기 시작했다.

비암을 조심해야 되는 못 가라서 발치에 신경 쓰며 연당을 한바퀴 도는데 연 줄기 빡빡한 물속에서 꾹꾹 거리며 텀벙대는 소리가 들려 바짝 긴장이 됐다.

저 시커먼 심연에서 혹시 개구리가 물뱀에 휘감긴 건 아닐까 싶었는데 몰 속에서 금빛 잉어 등짝이 보였다.

휴~ 그 순간 등장해 준 잉어가 얼마나 반가웠던지.

자리를 가장 많이 허락받은 백련은 계속 피고 진 듯 어느새 연밥 실하게 솟아났고 잎새마다 건강미 넘쳤다.

반면 예년에 비해 형편없이 움추러든 홍련.

기갈스레 영역 넓힌 수초에 밀려 저만치 물가로 물러난 채, 병색 완연히 누렇게 갈변된 이파리 힘겨이 꺾였다.

같은 생장 조건의 연못인데 무엇이 홍련을 저리 시난고난하게 만들었을까.

줄기도 잎도 꽃도 눈에 띄게 나약하고 가녀린 상태라 틈입자들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던가.

힘이 딸리니 내 영역조차 지켜내지 못하긴 식물만의 일이 아니라서 안쓰럽고 애틋하다.

굳건히 터전 넓혀가는 부레옥잠과 도전적으로 옆자리 잠식해 가는 수련에서 어떤 나라의 탐욕이 떠올랐다.



법화사 안내문을 읽다가 1990년 법화사 터(法華寺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건물터 다섯 곳과 초석 기단 터 세 곳이 확인되었으며 여러 유물을 발굴했다는 것.

당초무늬 암막새, 연꽃무늬 수막새 등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기와가 양호한 상태로 발굴되었으며, 해무리굽 청자 편과 북송의 화폐인 숭녕중보(崇寧重寶)가 발굴되었다고.

현재의 법당 자리에서 금당지로 보이는 건물터가 발견되었는데, 앞면 5칸·옆면 4칸에 면적이 약 100평인 대규모 건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고.

법화사는 건물 기단의 바닥돌이 2단으로 되어있으며 출토된 도자기와 기와조각 등으로 미루어 10세기∼12세기 경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대웅전 뒤편에 있다는 발굴터를 다녀오기로 했다.

탑 근처에 이르렀는데 비꽃 기척도 없이 갑작스레 작달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양산을 펼칠 새는커녕 시야가 뿌옇게 흐릴 지경으로 엄청스레 퍼붓는 비.

느닷없이 퍼붓는 빗줄기 못잖게, 타고난 성질 화급해 좌우 살필 거 없이 행동부터 앞서는 자신이다.

보기와는 달리 조신하긴커녕 다혈질에 천방지축 나대는 돈키호테다.



가까이에 세워져 있는 간이천막 안으로 냅다 돌진했다.

그러다 각목 같은 쇠 파이프에 이마를 쎄게 박고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순간 번갯불이 번쩍 튀었고 정신이 얼떨떨했다

세로로 튼튼하게 박힌 스틸 파이프만 생각했지 가로 지지대가 있으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것.

일단 천막 안으로 뛰어 든 다음 몸 상태를 점검했다.

양팔도 이상은 없었고 두 다리 역시 무탈했으나 머리가 욱신거렸다.

아픈 이마에 손을 대니 혹이 도드라지게 잡혔다.

해우소로 가서 후지른 옷을 지리잡고는 거울을 보았다.

보톡스를 맞은듯 한쪽 이마 주름이 싹 펴졌다.

선암사 해우소 이래로 맘에 쏙 드는 기왓장 담벼락의 멋진 해우소라 씩 웃었다.

아무튼 쓰라린 부분은 없으므로 외상은 입지 않았으며 천만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다.

땡큐, 갓!

이만만 한 것이 어디냐, 행운의 네 잎 클로버 덕을 본 건지 아무튼 천지신명이며 조상님 두루 감사합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셀린 위에 안티프라민을 두텁게 바르고 파스를 한 장 턱 붙여놨다.

거울을 다시 보니 참 화상이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특별자치도 하원북로35번길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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