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 놀이에 대한 변명

by 무량화

우리의 삶은 누구나 작품이 될 수 있다.

사소한 붓놀림 하나하나가 모여 다채로운 색상과 훌륭한 질감이 숨 쉬는 작품을 만들 듯

사소해 보이는 일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삶의 작품을 만든다.

-정진홍 칼럼 중에서-





컴퓨터를 처음 배운 건 아들로부터다

아들이 대학생이던 90년대 초였다

마우스 조절조차 힘들었는데 자꾸 하다 보니 익숙해지기에 이르렀다

블로그를 만든 건 98년, 당시는 홈페이지였다

전적으로 딸의 도움에 힘입어 개설한 홈피다

하나 가르쳐주면 그 하나에 머무는 단순 작업으로도 몇 년 재밌게 즐겼다

조금도 발전은 없었지만 지치지 않고 잘 놀았다

원래 기계치 인터라 기술적인 면은 지금도 여전히 헤맨다

놀이기구 외의 컴퓨터는 나의 백과사전이고 정보창고이고 요리선생이다

해결사이고 기상대이고 나침판이며 영어 단어집이다

메모장이고 낙서장이자 저장노트이다

숨 쉬듯이 편안하게

생각의 결 자유로이 헤엄치도록 풀어놓는 글쓰기 연습장이 컴퓨터다

노동이 아닌 놀이로 즐길 수 있는 글쓰기 놀이터인 공간이 컴퓨터다

잡다한 기록들이 쌓이면 추려서 책을 묶곤 했는데 그도 부질없는 짓 같아

언젠가 바람처럼 스러질 여기 허공 정자에나 모아두기로 했다

그 무엇에도 매임 없이 가비얍게

일지 쓰듯 매일이다시피 끄적거려 대는 이 공간

문자공해는 일으킨다만, 출판공해 저지르는 대신 아주 잘한 선택이라 스스로 신통해한다.



그 컴퓨터로 인해 손자넘과 참 많이 갈등 일으켰으며 또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적당히 절제만 되면 무슨 문제랴, 코를 박고 몰두하는 게임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시력도 한층 나빠지고 자세도 좋지 않아 졌다

공부하고 책 읽을 시간을 요리조리 갉아먹어버리는 괴수가 바로 이 컴

아마도 맘 놓고 밤샘 게임을 하라고 하면 신이 나서 밤 꼴딱 새울 것이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했다는 게임이다

그렇다 보니 기계도 능수능란하게 잘 만지고 손도 재빠르다

컴퓨터에 관한 한 기능 쪽이든 시스템 쪽이든 완전 도사다

얼마 전 꼭 필요한 기법 한 가지를 어찌어찌 배우긴 했지만

더 많은 다양한 기능들을 배우려 해도 기술적인 머리가 워낙 둔재임을 인정하는지라

아예 그래서 더럽고 치사하고 아니꼬워서 배울 생각을 않는다

그러다 재미 붙여 나까지 이 급류에 휘말릴까 봐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산다

하지만 나 역시도 컴퓨터 앞에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긴 매 한가지

손자는 어느새 슬그머니 나의 컴선생이 되어있었다.



녀석의 넥타이 이야기를 하려 한다

유학생이다 보니 사립 중학교에 다니는 녀석이라 줄곧 교복을 입고 다녔다

그럭저럭 유월 졸업을 앞두어서인지 얼마 전부터 드레스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라 했다 한다

흰 와이셔츠를 두 벌 사고 넥타이를 색깔별로 몇 개 구입했다

아들이 넥타이를 맨단다, 했더니 기분 흐뭇한 아범이 또 여러 개를 소포로 부쳐왔다

넥타이를 처음 매던 날

할머니, 넥타이 어떻게 매요?

너무 오래전에 해본 일이라 영 모르겠어서 넥타이만 만지작거리다 말았다

인터넷에서 찾아보면 되잖아

일 분이나 겨우 지났을까?

녀석이 척하니 넥타이를 매고 나왔다

고마운 컴, 인터넷의 순기능이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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