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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5. 2024

후원자

한번은 꼭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  이유가 있다.  한참 전,  부산에서 <가우디 건축 디자인 특별전>이 열리는 전시실에 들른 적이 있다. 돌로 만들어진 성서라 칭해지는 유명한 성가족 교회를 만든 가우디.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아니 스페인 건축을 상징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1883년에 착공돼 지금까지도 공사가 진행 중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걸려야 완공에 이를지 모른다는 너무도 이름난 건축물이다. 가우디의 그 성가족 교회 실물을 가까이서 쓰다듬어보고 싶은 것이다.

마치, 무늬 넣어가며 코바늘 뜨개질한 뾰쭉모자처럼 높이 치솟은 첨탑 형식도 무척 독특하다. 복잡해 보일 정도로 섬세 치밀한 구성미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로마 고전양식에 고딕 요소가 가미된 성가족 교회는 그러나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자유분방함과 독창성이 돋보이는 건축 기법이라 한다. 바르셀로나 현지를 둘러본 여행자들은 한결같이, 그 건축물이야말로 규모는 물론 형태면에서 놀랍다 못해 아예 멍하게 만들더라고. 그만큼 거창하고 특별스런 성가족 교회다. 스페인을 가본 적은 없더라도 대부분 그 건축물은 낯이 익을 터다. 사진이나 영상물을 통해 진작에 상면한 바 있어 웬만하면 아~ 그 건축물, 하며 고개 끄덕일 만큼 널리 알려진 성가족 교회 사그라다 파밀리아.

흰 수염 덥수룩한 노년의 가우디 사진들과 청동 흉상을 거쳐  파격에 가까운 그의 건축세계로 빨려 들어갔다. 물론 그날의 전시 내용 자체가 실물을 옮겨올 수 없는 건축물들이므로 주로 패널 사진과 입면도 단면도 등의 설계 도면들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 외에 몇 점 건축 구조물 일부와 가구 등속을 전시하는 중이었다.

자연에서 받은 영감을 정화 발전시켜 건축물로 표현해 낸다는 그다. 동양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고대 그리스 문학의 신화에도 심취했던 그의 예술 정신은 자연 친화적이면서 동화 같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지녔다고 평가되고 있다. 일찍이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처럼 그가 만든 건축물 거개는 수직 또는 직각의 곧은 선이 아니라 자연에서 차용해 온 곡선이 주종을 이룬다. 하여 통상 건축물은 네모꼴을 기본으로 한다는 고정관념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건축기법이나 어떤 미술양식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이고도 난해한 스타일로 상징된다. 따라서 시대를 초월함은 물론 보편적 상식을 뛰어넘는다. 발상 자체가 비범하다 못해 거의 기상천외하다. 추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상상력을 건축에 즐겨 적용시킨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신비감 내지는 괴기한 느낌마저 든다. 하여, 천국에서 지옥으로 오가는 기분을 들게 한다고 토로한 평론가도 있을 정도다.

온갖 동식물이 망라된 숲속나라 같은 공원 장식, 운강 석굴의 일부를 옮겨 놓은 듯한 기묘한 주택도 있다. 그럼에도 건축공학적으로 완벽하고 더없이 합리적인가 하면 주변과 건축물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니 신기하고 신통스럽다. 자연과 예술의 결합체에서 그가 추구한 궁극의 건축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 그대로다. 나아가 건축에 조각과 디자인을 가세시킨 장식적 요소가 눈길을 끄는데 특히 세라믹이며 타일이나 벽돌 또는 현무암과의 조응까지 자못  현란스럽다.

그뿐인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구엘 공원, 밀라 저택, 구엘 궁전 등은 거대한 조각에 가깝다. 기실 그는 집을 짓는다기보다 총체적인 예술작품을 만들어냈다. 곧 그의 건축물은 사람이 살 수 있는 조각품인 셈이다. 독신의 한 생을 가톨릭에 귀의한 채 검소질박하게 살면서 오로지 건축예술에 심혈을 바쳤던 가우디. 카탈로니아의 구리 세공인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그는 바르셀로나 대학에서 정식으로 건축수업을 받은 건축학도다.

시대를 앞선 이단아였던 가우디는 뒷날, 그의 탁월한 기량을 제대로 인정하고 그의 정신을 옳게 이해하는 구엘을 만남으로 그의 예술혼은 거침없이 만개하게 된다. 부유한 사업가의 아들인 구엘이 기꺼이 재정 후원자 역할을 맡으므로 가우디는 마음껏 자유로운 상상력을 발휘하며 창의적인 작품활동에 매진할 수 있었다. 단순한 거래 관계 즉 건축가와 주문자인 고객의 입장이 아닌, 가우디의 건축예술을 진심으로 아끼는 구엘과의 소중한 인연. 그 덕에 가우디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맘껏 확대시킬 수 있었고 구엘은 가우디로 하여 그 이름을 영구히 세상에 남길 수 있었다.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이 그러했듯이.

상업과 금융업으로 프로렌스를 지배한 대부호였던 토스카나 대공 로렌츠 데 메디치. 그는 미켈란젤로의 후원자였다. 미술 외에도 각종 문예 활동을 장려하였던 그. 회화와 조각품들을 수집하고 아울러 당시 화가로 하여금 가족의 초상화 제작을 주문하는 등 예술의 활성화를 위한 측면 지원으로 문예부흥운동에 크게 기여한다.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 전성시대를 누린 메디치가의 정원은 고대 조각들로 가득 차 지붕 없는 미술관으로 불릴 정도였다던가.

오래전, 플로렌스를 여행하다 들른 메디치 가묘라는 한 교회당은 각종 조각품과 회화들로 미술관을 방불케 했다. 섬세한 조각으로 감싸인 대리석 관과 교당 정면의 십자가만 없다면 그대로 실제 미술관 같았다. 다 둘러보려면 며칠이 걸린다는 방대한 우피치 미술관의 소장품을 대충 셈해봐도 메디치가의 컬렉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만했다. 예술적 안목이 대단한 메디치가의 전폭적인 자원을 받은 미켈란젤로는 다빈치와 더불어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건축의 거장이기도 하다. 잘 알다시피 성베드로 성당은 그의 설계와 구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하느님과 아담이 손끝을 서로 맞대는 <천지창조>는 그가 남긴 불후의 명작. 타고난 예술적 재능을 충분히 펼쳐나갈 수 있도록 일찍이 그에게 가능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메디치. 해서 메디치의 이름은 아직도 형형히 살아있다.

연극에 대한 열정만으로 모인 가난한 극단에 자신의 병원 지하 공간을 빌려줘 상설무대로 쓰게 한 부산의 어느 의사분. 한 건설회사에서는 빌딩 내 사무실을 공연장으로 개조시켜 예술 단체들이 필요로 할 때 무상제공해 줬다. 바그너의 음악적 광기가 돌파구를 찾을 수 있었음은 바바리아 영주 루트비히 2세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모차르트의 음악은 천부적 재능에다 훌륭한 연주 장소가 한층 더 빛을 발하게 했다. 당대의 궁정과 귀족계급의 살롱 분위기는 그의 화려한 음악성을 유감없이 표출시키기에 적절하였으니까.

기업이 예술활동을 지원해 주는 메세나운동이라는 말이 그리 생소하지만은 않은 요즘. 더 많은 구엘, 메디치가 있어 세상을 아름답게 가꿔주는 참예술이 보다 활짝 꽃 피어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보다는 정경화의 오늘을 있게 한 그의 어머니, 끝까지 고흐의 뒷바라지를 해준 헌신적인 동생 테오, 클라라가 곁에 있지 않았던들 과연 슈만은 <시인의 사랑> 등 보석 같은 가곡들을 쓸 수 있었을지.

한번씩 어디론가 떠나보고 싶을 적이 있다. 일상이 왠지 팍팍하게 여겨지며 아무 데서도 감동을 느낄 수 없을 때, 무미건조한 생활로부터의 일탈이 절실하다고 여겨질 때가 가끔 있다. 그렇다. 무턱대고 목이 마른 데다 어쩐지 숨이 답답할 때, 만사 심드렁해지며 아무런 의욕조차 일지 않는 무기력 상태일 때가 더러 있다. 그런 때, 해갈과 조율과 충전을 위해 걸림 없는 자유 여행객이 되고 싶어 진다. 그때마다 발목 묶지 않고 나래를 달아주는 남편은 얼마나 고마운 후원자인지. 잡문에 매달려 부질없이 파지나 만들고 있는 나를 어이없어하면서도 그냥 무던히 지켜봐 주는 가족들이야말로 큰 후원자였음을 이젠 알겠다. 감히 명품까지는 욕심내지 않을지라도 최소한 그들이 부끄러워하지 않는 글을 쓰고 싶다.

1997년 창작수필 겨울호 게재, 그 후 이십여 년 지나 바르셀로나에 가서 성가족 성당을 우러렀다. 높은 하늘로 까마득 솟아오른 성가족성당. 가우디는 천심으로 성전 벽돌을 한 장씩 하늘 제단에 쌓아 올린 수행자였다. 성당 안의 스테인드글라스 한 장, 부조나 조각 한 점, 하다못해 문고리나 경첩 하나에서 조차 가우디의 성심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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