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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5. 2024

조화를 위하여

졸혼

요즘 우리 가족은 달랑 둘뿐이다. 두 식구가 각기 음용하는 물이 다르다. 한 주전자 안에서는 보리차가 끓는다. 옆 주전자에서는 우롱차를 우려낸다. 내 체질은 우롱차를 거부하고 그는 보리차를 싫어한다. 구수한 보리차 내음이 여물 냄새 같다니 어쩔 도리가 없다. 식성도 그는 육식 위주요. 나는 생래적으로 채식이 맞다. 생선이나 고기가 안 보이면 무조건 찬 없는 식탁으로 간주하는 그에 비해, 나는 누릿한 동물성보다 담백한 식물성을 즐긴다. 양식을 좋아하는 그와는 달리 토종 한식이 내 입맛에 맞는가 하면 그는 진밥을 선호하나 나는 되직해야 밥맛이 난다.

 

매사 이렇다. 식성도 판이하고 취미도 별개다. 각자 기호가 다른 것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상징적인 예가 일요일 풍경이다. 그는 낚시를 하기 위해 바다로 간다. 나는 산행에 나선다. 산과 바다로 뚜렷이 이분화가 되는 것이다. 바다 자체를 싫어할리야 없지만 나는 배를 타면 멀미가 심하고 생선 비린내라면 질색이다. 그러니 자연 따로따로다. 저물녘 쿨러에 고기가 묵직이 채워지면 그는 연신 싱글벙글이요 나는 어정쩡하니 뜨악한 표정으로 맞는다. 한때 열심을 내어 방생 불사에 동참한 나로선 고기를 낚아 횟거리로 장만하는 그가 내심 마뜩잖을 수밖에.

 

양극화 현상이 심각하게 두드러진 경우는 그 외에도 많다. 이를테면 성(性)에 따른 역할의 고집은 거의 확고부동이다. 소신껏 할 수 있는 자기 일을 가지고 활동 영역을 안팎으로 확충하길 원하는 나와, 전근대적 사고방식으로 여자를 집안에 묶어 두려는 그. 당연한 충돌과 마찰. 결국은 한쪽의 일방적인 체념과 포기로 겨우 와해를 모면한다. 그뿐 아니다. 감성적인 면과 뚜렷이 대칭 이루는 완고한 성정의 그가 상록수를 좋아한다면 나는 꽃나무 쪽에 훨씬 정이 간다. 즐기는 음악도 각각이고 영화 한 편을 두고도 희극과 비극으로 나뉜다. 하다못해 텔레비전 프로 선택에조차 취향과 관심사가 다르므로 각방에서 보는 게 편하다. 하나는 운동경기에 몰두하고 다른 방에서는 다큐멘터리에 빠져 있기 일쑤이니까.



어쩌다 식구끼리 여행을 갈 경우, 극과 극의 세계는 합일점을 못 찾고 줄창 평행선을 달린다. 큰맘 먹고 떠난 해외여행 때도 이견 조율이 쉽지 않긴 마찬가지. 뒤에 남겨진 사진을 보면 뚱한 표정으로 불만 서린 기색이 역력하다. 이건 주로 내 몫에 해당된다. 싱겁게 유람 보트 타고 축내는 시간이 아까운 한쪽은 역사관에서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어 한다. 물건 하나 사도 취향이 별개이니 한 사람은 흑을 고르고 다른 하나는 백이 낫다고 우긴다. 늘 이런 식이다. 극단의 서로 다른 면모로 대비되는 별개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는 그렇게 용케도 살아왔다. 어찌 보면 이런 부조화도 드물 성싶다.

 

중계방송되는 동계 올림픽의 피겨 스케이팅을 보았다. 황홀하게 매료시키는, 그래서 거의 환상적이던 러시아 팀의 피겨 스케이팅 조는 한 쌍의 신비로운 푸른 나비를 연상시켰다. 나풀나풀 가벼이 날다가 허공에서 빙그르르 돌기도 하고 홀연 발끝 부드러이 미끄러지는가 하면 어느새 한마음 되어 사뿐히 휘감기는 남과 여. 링크를 종횡무진 누비며 빠르고 화려하게 일궈내는 열정 어린 몸짓에 숨죽여 몰입했다. 한 치 오차 없는 깔끔하고 매끄러운 동작들, 실로 절묘하면서도 완벽한 조화였다.

 

그랬다. 더할 나위 없이 멋진 천상의 조화였다. 푸르디푸른 청춘의 한 쌍이 균형을 이루며 자재로이 누비는 은반. 사뭇 고조되는 긴장감을 희석시키는 여유로운 미소까지 잊지 않았다. 서로를 희롱하듯 애무하듯 절정을 향해 치닫는 푸른 나비의 우아하고도 날렵한 윤무를 보며 예술이 추구하는 미학의 정점, 지고의 선을 생각했다. 정녕 조화를 이룬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서로 어울려 알맞게 하는 조화는커녕, 희한하게도 그와 나는 무엇 하나 일치점이 없다. 그는 갈데없는 영남 사람이라 봉건적이고 쇠고집이나 화통한 면도 있는 천상 경상도 기질의 표본이다. 다혈질에 앞뒤 가리지 않는 급한 성격은 불 칼이 따로 없다. 허나 뒷심은 약하다. 반면 나는 충청인답게 우유부단 내지는 뜨뜻미지근하나 꽤 찬찬한 편이다. 몽니 궂다든지 쉽게 화를 내지는 않지만 한 번 틀어지면 풀기 어렵고 꽁한 마음이 아주 오래간다. 술술 털 줄 모르는 이런 성미는 오히려 다루기 까다로울 수도 있겠다.

 

매사 규격화, 정형화를 추구하며 피곤하게 쪼아대는 나와는 달리 그는 적당히 느슨하다. 소탈한 편은 못되지만 털털하다 보니 한정 없이 어지르거나 늘어놓고도 아예 무감각이다. 정리 정돈과는 거리가 한참 멀다. 그의 옷장 서랍은 치워놓고 돌아서면 어느새 뒤죽박죽 무질서 판으로 변해 있기 일쑤다. 모든 것이 단정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길 원하는 나와는 반대다. 그 때문에 결혼 초 꽤나 티격태격했다. 무엇보다도 뒤집어 벗어던진 양말짝, 뿌연 세숫물이건만 헹구지 않고 마치는 세면 방식은 기가 차다 못해 혐오감마저 들게 했다. 일일이 간섭하고 잔소리해 대며 바꾸려 하다 보니 부딪침만 잦았다. 결과적으로 본질을 개조한다는 것은 애당초 시도하지 말았어야 옳았다. 생긴 그대로 맞춰가며, 그러려니 하고 사는 편이 훨씬 수월한 노릇이었다.

 

하긴 우린 외형부터가 정반대다. 영양이 좋아 보이는 너부죽한 그에 반해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양 비리비리 깡마른 나. 살다 보면 부부끼리는 닮는다고 한다. 헌데 삼십 년 가까이를 함께 한 우리는 여전히 남과 북이자 청과 홍이다. 천지 차이라는 말대로 하늘과 땅이요, 불과 물처럼 극과 극으로 분류된다. 너무도 현저한 차이점 때문인지 더러 찾아지는 공통사항마저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결국 그가 해라면 나는 달이다. 그 극단의 대비가 통일된 하나를 이루는 우리. 참으로 묘한 조화 속이다. 그리하여 음양의 이치는 상호 보완적인가 하면 상호 필수적이라 했던가. 그가 능동적이고 강하니 상대는 절로 수동적이고 유(柔) 할 수밖에 없다. 똑같으면 깨어지거나 부러질 일만 남는다. 이 단계에 이르기까지 겪어야 했던 우여곡절이야 이루 다 말할 수 있으랴.

  

모자라고 부족한 것을 서로 메꾸어주고 보충해 나가라고 부부로 엮어지는 것. 천생연분, 부부는 하늘이 마련해 준 인연이다. 하고많은 사람 중에 배필로 짝 지워진 한 사람이니 소중한 인연. 그렇게 맺어져 서로 아껴가며 사는 바람직한 선연(善緣)도 많지만 잘못된 만남으로 괴롭게 사는 지독한 악연(惡緣)도 적잖다. 새삼 선연이든 악연이든 어찌할 것인가. 어차피 갈등구조 속에서 살아가게 마련인 인간사. 상대의 능력을 인정하고 북돋우는 배려는 내 욕심이라 접어두기로 한다. 나 또한 그에 대한 이해와 긍정이 턱없이 모자랄 적이 많으니까. 보기 좋은 조화 관계도 필요하겠지만 이 나이쯤에 이르니 끝까지 서로 한 방향을 바라보며 사는 일이 더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든다. 1996


                            ***


이 글을 쓴 지도 제법 됐다. 이젠 어언 결혼 53년째에 이르렀다. 그러나 부부가 함께 한 생활은 사십 수년. 완전히 결별을 한 거는 아니지만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따로따로 지낸 지 꽤 되었다. 결혼생활 카테고리 안에 졸혼이란 단어가 낯설지 않게 자리 잡아가는 추세다. 몇 년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들이 넌지시 이런 말을 건넸다.'엄마를 위한 시간, 진정한 휴가가 엄마에게도 필요하다'라고. 자유롭고 독립적인 싱글 라이프를 살아보라며 슬쩍 운을 띄웠다. 살아오면서 수시로 꿈꿔온 자유가 아닌가. 아빠에겐 아들이 통보를 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면  뭐락카노!? 목청이 올라갔을 텐데 남편은 자식 말에 아무 토도 달지 않았다. 그간의 행적과 자신의 독선을 스스로인들 왜 모르랴. 게다가 자식도 오십 넘으면 어렵고 조심스럽다. 그렇게 우린 자연스레 각각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각자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하여지간 마음 편하게 건강하게, 통화시마다 후렴처럼 따르는 멘트다. 둘 다 건강한 동안은 이 생활이 유효하다. 만일의 경우 어느 한쪽이 아프면  자녀들 짐이 되지 않게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겠지. 내 집이 있는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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