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상사화

by 무량화


어느 집 뜰에 오롯이 피어난 상사화가 발길 멈춰 서게 했다.

오랜만이구나, 상사화야! 산타바바라 미션 후원에서 널 보고 한국에선 몇십 년만의 해후로구나.

상사화의 기억은 유년기 외갓집에서부터 비롯된다.

뒤란 장광 옆 앵두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렸던 앵두 따먹다 쐐기를 보고 흠칫 놀라 물러서며 밟았던 난초잎 같은 한 무더기 연한 식물.

잎과 꽃이 영원히 만날 수 없는 상사화(相思花)였다.

한포기 식물인데 서로 잎과 꽃이 만나지 못하고 그리워 만 하는, 영영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란 꽃말을 가진 상사화다.

봄 내내 무성하던 잎새 시나브로 주저앉아 스러지고 늘씬한 대궁 꽃봉오리 물고 올라올 즈음이면 여름이었다.

마당가에 선 감나무에서 매미가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한여름.

무더위 아랑곳 않고 내내 의연하게 꽃대 세워 연분홍 고운 자태의 꽃 연달아 무성이 피우던 상사화.

숙성돼 가며 단내를 풍기는 장독대 장 항아리와 보리고추장 단지 행주질하는 외숙모 발치에선 새파란 부추가 키 움쑥 돋우고 있었다.

어린 나야 상사화 말 뜻을 모르니 무심코 보아 넘겼을 그 꽃.

배태를 못해 수심 깊었던 외숙모에게야 얼마나 의미심장하게 다가오는 꽃이었을까.

외삼촌이 인천에 볼일로 나가시면 조바심치며 언제 오시나 그리도 기다리던 심사 이제야 헤아려진다.

뒷동산에 올라 똑딱선이 들어오는 바닷가 향해 하염없는 눈길 보내던 외숙모....

정국이 좀 안정되면 충청도 해안가 외가 마을 찾아 평소 그리도 좋아하시던 오징어 사들고 두 분 산소 들러야겠다.

본향으로 돌아가서야 겨우 한 묏자리에서 쉴 수 있게 되어 외숙모는 이제 푸근하실까.


석산, 꽃무릇 / 상사화


서로 생각만 하고 그리워하면서 만나지 못하는 애련의 꽃 상사화는 백합목 수선화과의 여러해살이 식물이다.

연분홍 꽃이 전부였는데 요샌 개량해서 미색 주황색 흰색 꽃도 피며 영어이름은 매직 릴리다.

살몃 손짓해 유혹하듯 한 꽃술과는 달리 풍기는 향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장마 때라서 그런 건 아니다.

본래 향기가 없어 벌나비 찾아오지 않으며 꽃은 피지만 씨앗은 맺지 않고 대신 뿌리로 번식하는 상사화다.

불공드리러 온 속세 여인을 사모하다 상사병으로 눈을 감고 만 승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애틋한 연정.

안타까운 사연이 전설로 내려와서 인지 사찰 경내에서 자주 보이는 상사화다.

그 까닭보다는 상사화 비늘줄기 즙을 이용하고자 함이었으리라.

원래 방부제 역할을 하는 비늘줄기인지라 탱화 그리며 염료에 섞어서 사용했다고.

불경을 제본할 때도 풀에 섞어 쓰면 좀이 슬지 않고 색이 바래지 않기 때문이란다.

다른 하나는 절 주변에 수국이나 불두화처럼 꽃향기나 꿀이 없는 식물을 심는 이유에서도 찾아진다.

하긴, 아름다운 꽃에 벌과 나비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노라면 초보 수행승 기분 싱숭생숭해지지 않을까.

번뇌망상 생겨 수도정진에 방해될까 저어하여 향기 없는 상사화를 심었을 터다.

더러들 석산(꽃무릇)을 상사화라고도 부르는데 둘 다 사찰에 흔하고 기다란 꽃대궁을 가진 외엔 외양부터가 영 다르다.

아무리 무리 져 펴도 상사화는 촌 아낙처럼 소박하고 수수한데 비해 석산꽃은 화려하다 못해 요염하기까지 하다.

석산은 왠지 천경자의 또아리 튼 뱀 그림에 배치하면 알맞을듯한 꽃.

상사화는 사임당의 초충도 구석에 끼어있어도 무방할 듯싶다.

무엇보다 상사화는 잎이 진 다음에 꽃대 올라오나 반대로 석산은 꽃 지고 나서야 잎이 올라온다.

상사화나 석산꽃이나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둘의 공통분모는 찾을 수 있긴 하다.

뜨락 후박나무 너른 이파리에 듣는 후드득 빗소리가 끝 모를 상념에서 깨어나게 한다.

비 흩뿌리기 전에 어서 돌아가라는 재촉이 성가시기는커녕 고맙기조차 해 고분고분 따른다.

사진 몇 장 담고는 가던 발길 거두어 되돌아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