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캘리포니아에서다.
온누리의 만상이 저마다 활기찬 생명력을 자랑하는 여름철.
딸내미와 휴가여행을 갔다가 며칠 만에 집에 와보니 뒤란 잔디밭에 잡초가 수북이 자랐다.
가히 잡초 왕국이다, 칭기즈칸이 대륙을 평정하듯 아주 알뜰하고도 야무치게 점령해 놨다.
예전 어른들이 콩밭이나 고구마밭에 풀이 지천으로 우거져 있으면 '호랑이가 새끼 치겠다' 하던 그대로다.
요즘 신문기사 제목처럼 과장되이 뻥튀기를 하면 공룡들이 돌아와 노닐 판이다.
왕바랭이, 쐐기풀, 괭이밥, 여뀌, 민들레, 방동사니, 쇠비름, 피, 독새기풀, 별꽃, 명아주, 강아지풀, 토끼풀, 냉이, 망초 등등.
풀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멋대로 자라 어느새 꽃도 피어난 데다 씨까지 맺고는 자못 기세가 등등하다.
어찌나 탐스러이 키 돋우고 영역 넓혀 한껏 덤불 져 우거졌는지 잔디 깎는 기계가 순순히 먹혀들 거 같지도 않다.
어쩐다?
그런데 가만, 잡초라고 하찮게 여겼고 귀찮아하던 그냥 풀들인데 뒤뜰에 넘쳐나는 푸른 기운 하며 고쳐보니 제법 그럴싸하다.
한 뼘 녹지가 아쉬운 사막에서야 이마저도 감지덕지다.
낙화인들 꽃이 아니랴/ 쓸어 무삼하리오, 라 읊은 시인도 있거늘.
하물며 우연히 주어진 무상의 이 자연산 plant야말로 고마운 녹색 선물 아니랴.
비밀의 화원처럼 제멋대로 얽히고설켜 무성한 잡초 무리들이 보여주는 건강미가 싱그럽고도 아름차다.
앞뜰 잔디밭이야 나 좋을 대로 방치할 수 없으나 뒤란이니 그래, 여름 한철 자유로이 클 대로 맘껏 커보거라.
기르며 즐기기로 작정한 이상 이젠 잡초가 아니라 짙은 푸르름으로 눈을 청량하게 씻어주는 화훼 식물이 된 풀들이다.
광합성이 뛰어난 데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식물이 잡초라는 식물학자들 보고대로 공기정화식물로서도 한몫.
어릴 적부터 낯 익힌 풀들인데 이국땅에서도 만난 강아지풀 왕바랭이 쇠비름 명아주야 반갑다.
토질이 좋아서인지 한국산보다 잎이나 줄기가 한층 더 크고 억세다.
단 하나 아는 영어명 Foxtails는 우리말로 독새기풀.
씨앗 맺으면서부터는 대궁을 손으로 뽑아 일일이 제거해줘야 하는 골치 아픈 풀이다.
세 가닥으로 뻗은 미늘 같은 씨앗이 무척 날카롭고 거칠어 그 풀씨가 동물의 눈이나 귀에 들어가면 대형사고를 친다.
지난해 가을 울집 멍이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염증이 생겨 한바탕 소동을 벌어지게 만든 주범이다.
가지를 많이 치면서 사방으로 퍼져 방석 모양으로 땅을 덮는 불그레한 쇠비름.
뽑더라도 밭고랑에 그냥 두면 다시 살아날 만큼 끈질기게 다시 뿌리를 내리는 쇠비름이다.
줄기의 마디로부터 뿌리가 나와 옆으로 퍼지는 왕바랭이.
지면을 기면서 마디마다 뿌리를 내리는 방식으로 빠르게 번식하는 데다 뽑아내도 한 마디만 남아 있으면 되살아나는 질긴 목숨이다,
밟힐수록 더 강인해지는 질경이. 생장점이 줄기 끝이 아닌 뿌리에 있어 잎이 웬만큼 상해도 끄떡없다.
명아주도 흔하디 흔한 잡초의 하나다.
줄기 사이에 달리는 어린잎은 희끄무레한 빛을 띠는데 다 자란 명아주 대를 말려 만든 청려장(靑藜杖) 지팡이는 가볍고 단단한 귀물이다.
봉숭아물 들일 때 백반 대신으로 쓰이는 괭이밥. 크로바보다 작은 잎을 살짝 씹으면 신맛이 나는 작고 귀여운 풀이다.
아이들이 '계란꽃'이라 부르는 개망초꽃은 데이지꽃보다 오히려 귀엽다.
망초라는 이름은 개화기 나라가 망할 때 들어와 전국에 퍼진 풀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던가.
별다른 쓰임새도 없고 번식력이 왕성해 안 키워도 마구 자라는 풀의 통칭으로, 뭉뚱그려 잡다한 풀이란 뜻을 가진 雜草.
자리 잡은 터가 적당하지 않아도 약간의 물과 햇빛만 있으면 꿋꿋하게 살아가는 잡초는 강인한 생명력의 표본이다.
열악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기어코 살아남는 근성 있는 풀이다.
흔히 뒷골목에서 험하고 거칠게 산 사람을 뜻하는 잡초 같은 인생은, 세상 풍파 모르고 온실 속의 화초같이 곱게 산 사람과
대비되듯 잡초는 우선 모질고도 끈질긴 명줄을 타고났다.
그러니 척박한 박토라도 환경 가리지 않고 잘 자라, 거름을 준다거나 따로 돌볾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잡초는 농작물(crop)과 비교했을 때 용처가 조금 미흡한 식물이라고도 했고, '사람이 관리하지 않은 식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 시인 랠프 에머슨은 '그 가치가 아직 발견되지 않는 식물들'이라 정의했다.
잡초는 사람이 재배하는 작물(作物)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우리 입장에서 쓰임새에 따라 평가를 해 자의적으로 구분한 셈.
그런가 하면 과거에 잡초였다가 나중에 숨은 가치를 공인받아 농작물로 인정받기도 하고 그 반대도 생긴다.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듯하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오늘날 잡초로 전락한 ‘피’도 원래는 작물이었다.
단백질과 지방에 섬유질이 풍부한 피는 영양 면에서 쌀·보리에 뒤지지 않으나 맛이 뒤떨어져 그만 잡초로 전락했다.
반면 최근 들어 일부 잡초는 건강식품으로 각광받으며 귀한 식재료로 대접받고 있다.
고들빼기는 김치를 담고 민들레는 차로 마시며 토끼풀은 샐러드 재료로 인기다.
가치가 재발견되며 잡초는 약재로서도 주목받고 있어, 병풀은 흉터 치료 연고의 주원료로 활용된다.
개똥쑥은 말라리아 치료제에 항암제로, 쇠비름은 오메가 3의 원료로 활용된다.
알코올 제조용이었던 돼지감자는 한때 잡초로 취급받았으나 최근 들어 건강식과 별미식 재료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습지에서 자생하는 부들의 줄기와 잎, 뿌리에선 석유 대체 에너지인 바이오 에탄올을 추출할 수 있다고 한다.
꼭두서니(붉은색), 칡(갈색), 민들레(노란색)처럼 식물성 친환경 염료로 사용되는 풀도 있다.
기근이 심할 땐 식량을 대신하는 구황 작물 역할을 했던 쑥이며 무릇도 분류상으로는 풀이다.
뒤란 까마중이도 잡초이지만 여름내 냉동 바나나와 진보라 까마중 열매를 우유 부어 믹서기로 돌리면 근사한 스무디가 된다.
따지고 보면 잡초란 식물은 없다. 잡초의 개념은 상대적이어서 보리를 키우는 보리밭에 옥수수가 나면 옥수수도 잡초요, 콩밭에 난 감자도 잡초 취급 당한다. 뒤란 잡초 덤불 속에는 화초인 접시꽃 봉숭아 분꽃도 섞여있다. 잡초의 기에 눌려 크지도 못하고 앉은뱅이 되어 자그마한 채로. 본래는 꽃이나 지금은 그냥 풀로 살아간다.
일반 잡초가 인간의 관점에선 무의미한 식물이지만 생태계 차원에선 중요한 식물로 특히 표토층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게 잡초들이다. 나무가 없는 산야에 풀마저 없으면 큰비에 경사지 흙은 유실돼 버리고 만다. 소나 말이 먹는 목초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땅에서도 잡초는 자라 목초지 영토로서의 명분을 만들어준다. 강력한 잡초 뿌리는 땅 속 깊은 곳까지 침투해 영양분을 얻기 때문에 다른 식물도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원리다. 또한 풀 그늘은 토양의 건조를 지연시켜 황폐화를 막아준다.
바닥에 엎뎌 근근 명맥을 유지하는 잔디 영역은 자꾸만 줄어든다. 적자생존의 냉엄한 현장, 잔디야 너도 이참에 잡초처럼 보다 강하고 질긴 생존법을 익혀보렴! 이 세상 무엇 하나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다고 하였다. 한여름 시원한 관엽식물 대역을 해주는 무성한 잡초를 보니 존재하는 어느 것 하나인들 무의미한 게 있을까 싶다.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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