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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7. 2024

요세미티의 진면목

미서부의 쌔고 쌘 명승지를 놔두고 왜 사람들이 요세미티 요세미티, 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줍잖은 안목으로 가치를 감히 평가절하시켰던 요세미티인데 이번 산행으로 요세미티의 진가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드러내놓고 표현은 안 했지만 내심 요세미티에게 참으로 미안하고 민망스러웠다.


무엇이든 처음 느낌이 중요하다. 강렬하고 오래가기도 하는 게 바로 첫 인상이다.


그 인식은 아무래도 직관적이고 즉흥적이라 과히 믿을 게 못 되는데도, 첫 번째로 각인된 느낌에서 자유로워지기란 쉽잖다.


그래서인지 첫인상을 과감히 깨버린다는 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아예 선입견으로 박혀버린데다 고정관념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살던 때인 사십 대 중반, 친구들과 일 주간 패키지로 미서부 관광을  왔었다.


판에 박힌 스케줄대로 샌프란시스코 구경하고 킹스캐년 세쿼이아 요세미티 자이언캐년 그랜드캐년을 차례로 돌았다.


수박 겉 핥기식으로 거죽만 쓰윽 훑은 다음 라스베이거스에서 야경에 취했다가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처처마다 가장 소문난 명소에 들러 눈도장이나 찍는, 일 주간에 걸친 이른바 이름만 고품격 명품 여행이었다.  


가이드가 여기서 사진 찍으세요, 하면 우르르 몰려가서  인증샷 날리고 허겁지겁 차에 올라 일고여덟 시간을 자다 깨다 하면서 다음 목적지로 실려 다니자니 대자연의 장관에 격하게 감탄할 기운도 없었다.


시차도 있는 데다 새벽 기상이 보통이라 피곤에 쩐,채, 강행군이다시피 한 여행으로 우린 심신이 지쳐있었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지만 이건 고행이 따로 없다 싶었다.


도시 풍광은 샌프란도 엘에이도 그저 그랬다.


이미 한국에서도 서울 테헤란로나 부산 해운대 인근 도심에 우후죽순처럼 솟은 세련된 디자인의 첨단 고층 빌딩들에 익숙해 있었으니까.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그랜드캐년을 지나며>를 교과서에서 읽고 오래 흠모해왔던 그랜드캐년도 숨 멎을듯한 충격으로 다가올 정도는 아니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랬다, 아무리 좋은 풍광이라도 당장 자신이 너무 힘들고 지치니 어떤 것도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상황이 그럴진대 자이언캐년이고 요세미티고 진작에 사진으로 본 거나 실제나 그게 그거, 별 감흥이 일지를 않았다.


여행사들은 주어진 시간 동안 한곳이라도 더 둘러보게 스케줄을 짜려 하니 빠듯할 수밖에 없는 일정,.


그러니 어디나 그저 시간에 쫓겨 바삐 움직여야 했으므로 도무지 여유란 게 없었다.


요세미티, 하면 기억나는 것이 거대한 해프 돔과 요세미티 폭포뿐으로, 그나마 시월이었던 당시라 가뭄이 들었던지 폭포수가 메말라 물줄기는 빈약하다 못해 초라했다.


그래도 일행 중 우리만 기를 쓰고 폭포 바로 아래까지 바윗덩이 헤치고 올라가, 남는 건 사진뿐이라며 폭포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다.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 올라올 엄두를 못 내고 주변 숲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으니 우린 폭포줄기 아래서  대단한 쾌거라도 이룬 양 두 팔 벌려 환호했었다.


그날 요세미티에서는 불과 오후 한나절이나 머물렀을까,


해서 한 덩어리 암석으로 이루어졌다는 핼프 돔과 병아리 눈물 같은 요세미티 폭포를 본 것이 전부였다.


이후 누가 요세미티 얘기를 하면 에이~별로야, 대관절 볼 게 뭐 있다고... 하는 소리가 나왔다.


단편적으로 잠깐 그것도 단 한 번 보았을 뿐인 그곳을 이리 과소평가하고 깎아내렸던 것처럼, 살면서 그런 류의 오류를 얼마나 범했을까.


대충 외모나 표피만 훑고 사물을 판단하기는 이뿐만이 아닐 테니, 알게 모르게 그간 수없이 저질렀을 잘못이 무릇 얼마이랴.




잠자코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련만 얼핏 본 인상을 가지고 뭘 좀 아는 척 시건방을 떤 게 무색해질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두 번째 방문으로 비로소, 요세미티는 여유 있게 걷고 깊이 있게 느끼는 가운데 그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 곳임을 알 수 있었다.


두서너 코스 정도 트레킹도 하고 야영을 하며 자연의 생생한 숨소리를 가까이 들을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이겠다.


시간과 구름과 바람이 이루어 놓은 경이로운 신의 작품인 요세미티는 빙하기 때 크게 쓸려나간 밸리 지역이라 어디 가나 물이 흔했다.


이제서야 요세미티 폭포가 상단과 하단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정도로, 전엔 주마간산격이자 맛보기 수준인 여행이었던 셈.


알고 보니 계절적으로도 폭포는 볼품없을 수밖에 없는 철이기도 했다.


시기를 잘 택한 이번엔 요세미티 폭포의 수량은 풍부했으며, 힘차게 여울지는 멀세드강 역시 많은 이들의 휴식처가 되어 주고도 남음직 했다.


순결한 자태로 첫눈에 반한 Bridalveil Falls과 조우하러 다시 요세미티를 찾아야겠다는 나의 심중을 헤아렸던가.


암벽등반의 메카라는 엘 캐피탄 수직 절벽이 요세미티를 뒤로하는 내게 묵직한 음성으로 '또 만나자' 며 눈짓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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