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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7. 2024

비 몰고 다녀요

자꾸 산이 부르는군, 주문 외듯 그러더니 말 그대로 딸내미 여름휴가는 산행으로 정해졌다. 이틀간을 휘트니 산속에서 지낼 거라 했다. 주구장천 너른 사막과 붉은 황야에서만 살다시피 한 나 역시 초록빛이 고팠다.

그간 여러 차례 휘트니를 찾았어도 트레일에 오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꽃 흐드러진 사월, 단풍 든 구월인데도 눈 때문에 아예 초입부터 입산금지 팻말에 제지당해 맥없이 돌아서야 했다. 애꿎게 인근 앨라배마 힐만 수차 오르내렸다.

휘트니 정상 고도는 4418미터다. 차로 올라갈 수 있는 휘트니 포털은 해발 2548미터, 휘트니의 현관이자 산행 들머리다. 반 이상을 편안히 차를 타고 정상 향해 이동하는 셈이다. 허나 3천 미터 조금 지나면 고산증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야영 준비를 갖춰 별빛 맑은 주말 새벽, 론파인으로 달렸다. 풍력단지를 지날 즈음 화창하다 못해 햇빛 눈부시게 쨍쨍했다. 휘트니의 웅자가 저만치 드러나기 시작하는 지점쯤에 들어서자, 안 그래도 삭막한 바위너덜에 짙은 그림자가 어룽거렸다. 떼거지로 몰려든 구름장이 만든 그늘이었다.

휘트니 포털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덧옷에다 요기거리와 마실 물만을 챙겨 산행에 나섰다. 비구름이 오락가락하면서 가랑비와 소나기를 번갈아 뿌렸다. 모자도 필요 없고 산에 오르기 딱 좋은 시원한 날씨네. 간간 스치는 폭포소리에 귀를 맑히며 지그재그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진한 땀내를 풍기면서 하산하는 백패커들과 자주 엇갈렸다.

 

물길도 건너고 죤뮤어 트레일 안내판에 반가워도 하며 두 시간 너머 걸었을까. 그 무렵부터 숨이 가빠왔고 급격히 체력이 떨어졌다. 핑~하며 어지럼증도 일었다. 다리는 모래주머니를 매단 듯 무거웠다. 단순히 오랜만의 산행이라 그러려니 했다.

사진 찍으며 천천히 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앞장들 서, 이르고는 일행과 좀 쳐져서 쉬엄쉬엄 걸으며 에너지바를 뜯었다. 그래도 계속 기운이 딸리는 게 아무래도 체력에 부쳤다. 한참 앞서 가다 기다리던 딸내미가 내 얼굴을 보더니 대뜸 안 되겠다며 무조건 쉬잖다. 힘들면 진작 말하지, 괜히 무리하다 큰일 나.



청색증이란 단어를 그때 처음 들었다. 겁 많은 엄마라 얼른 부연설명을 해준다. 저산소증, 즉 고산적응이 안 된 몸의 반응이란다. 병은 아니고 산소운반이 원할치 않을 때 신체가 보내는 이상신호로 일종의 주의 싸인이란 얘기다. 혈관운동이 불안정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했다. 


쉬다 걷다를 반복했다. 일행을 얼추 따라잡았다 싶으면 다시 숨이 가빴다. 얼핏 손톱을 들여다보니 평소의 옅은 분홍 빛깔이 아니다. 일단 청색증이 발생했다는 말은 심장에 무리가 가기 시작했다는 뜻이므로 안정부터 취해줘야 한단다. 호수까지 안 가도 되니 느긋하게 맘먹어. 컨디션 조절하며 갈테니 염려말라고 했으나 만만히 여겼던 론파잌 레익은 멀기만 했다.



골짜기 바람이 불어오는 바위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바로 곁 나뭇가지에서 깃털 파란 산새가 힘내라는 듯 맑은 소리로 지절거렸다.


이제야 입술색이 정상으로 돌아왔네, 딸내미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마음 같아선 휘트니 정상도 고도적응훈련없이 올라갈 수 있으리라 자신했건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꼭 가보고 싶던 마추픽추도 재고해야 할 정황 같았다. 제법 고도가 높은 지대에 살면서도 그 환경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일상인데 그와는 경우가 다른가?




처음 목표했던 장소인 론파인 레잌에 기어코 다달았다. 거기까지가 퍼밋없이 갈 수 있는 곳이다. 어디나 그러하듯 눈에 띄게 물이 줄어든 호수 언저리에 씨알 굵은 송어들이 가까이 다가와 기웃거렸다. 흘린 빵조각을 던져주려다 흠칫하고 얼른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지구촌 많은 환경론자들이 존경해 마지않는 시에라클럽이 지키고 있는 미국이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개발은 최소화하고 철저한 환경보호를 최우선으로 삼는 나라다. 자유국가이면서 자연에 관해서만큼은 규제가 심하다 못해 무척 까다롭고 깐깐하다. 내려오는 길은 아주 수월했으나 안개 같은 비에 옷이 젖어 약간 추웠다.


 


하산해서 어둡기 전에 텐트부터 쳤다. 나무가 드문드문 서있는 캠프그라운드에는 바비큐 시설과 모닥불을 피울 수 있는 장소(Fire ring)가 마련되어 있었다. 무쇠로 무작스럽게 만든 곰통 캐비닛은 녹이 슬어있지만 거기다 식재료들을 넣어두었다.


올 적마다 번번 느끼는 바이지만 유독 이곳에서 키우는 블랙앵거스 스테이크 감은 입에서 살살 녹는 최상품. 이 동네서 구입하는 소고기는 그만큼 연하고도 신선하기에  저녁 찬거리를 사러 론파인으로 내려갔다. 장작 한 다발과 고기를 사들고 나오는데 굵은 빗방울이 투다닥 쏟아졌다. 뇌성도 요란했다. 하늘을 보니 금방 그칠 비가 아니었다. 엄마는 비를 몰고 다니나 봐, 흐음~맞네! 올여름 내내 가는 곳마다 비 풍년이다.


  


캠프그라운드로 돌아왔을 때는 돌풍과 함께 폭우가 더 심해졌다. 차에서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차창너머 건너다본 휘트니는 비안개로  아예 자취 묘연하고 시에라네바다 산맥조차 몽땅 시커먼 구름에 점령당해 버렸다.


텐트는 풍랑 심한 바다에 뜬 일엽편주 깃폭처럼 마구 펄렁거렸다. 어느 집 텐트인지 몸통째 뽑혀 뒹굴어 다녔다. 텐트를 친 다른 이웃들은 쥐 죽은 듯 잠잠, 다들 대피를 했나? 아무런 기척이 없는 걸 보면.


현지 일기를 체크해 보니 밤 아홉 시까지 비가 온다는 예보다. 그러나 '맑고 구름 약간'이란 기상정보만 믿고 떠난 여행인데 더 이상 예보에 기대지 말자. 만일 지금 같은 기세로 비가 밤새 쏟아진다면 골짝 물이 불어 조난당할 위험성도 있고. 줄기차게 퍼붓는 폭우와 우르릉거리는 천둥소리까지 지구 한 모퉁이를 요절내고 말 거 같았다. ​



철수하기로 작정하고 비가 수굿해지기만을 기다렸다. 약간 빗발이 뜸해지자 재빨리 움직였다. 납량특집물 찍듯이 천둥번개 후려치며 빗줄기 성성한 밤의 어둠 속에서 텐트를 서둘러 거두었다. 빗물에 폭싹 젖은 침낭이며 옷가지, 곰통에 보관해 둔 음식들을 재빨리 챙겨 차트렁크에 쑤셔 넣었다.


예상밖의 돌발사태에 하릴없이 당일치기로 돌아오는 길. 항용 그러하듯 삶의 여정도 처음 목표점이나 진로로부터 빗나가기 일쑤다. 인요 카운티를 벗어나고도 한참까지 비가 쏟아지더니만 집 가까이 이를 즈음 정말 깜쪽같이 하늘이 개여 별빛 총총 빛나고 있었다.


올여름은 가는 곳마다 비를 만난다. 비를 몰고 다닌다는 퉁박을 들어도 내사 좋기만 하다. 캘리포니아 심한 가뭄에 내리는 반가운  단비니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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