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y 07. 2024

흰 카네이션

머더스 데이

어머니, 그 이름은  


느닷없이 이민 바람이 불었지요


미혹의 바람에 흔들리던 그때


저를 향한 어머니 눈길


내내 잊혀지지 않아요


자못 애틋해서


못내 안타까워서


말문조차 트이지 않던 어머니


차마 부여잡아 말리지도 못하고


어여 가거라 떠밀지도 못한 채


눈물보다 더 애연한 시선


이윽고 거두시던 어머니


그렇네요, 저는 어머니의 평생 애물이었네요


힘들어도 내색 없이 안으로 삭히고


괴로워도 지그시 참아 신음마저 삼키던


언제나처럼 그저


어머니는 아무 말이 없었지요


아주 오래전


홍역으로 땀 젖은 이마 짚어주시고


아픈 횟배 잠들도록 쓸어주시던 손길


한번쯤은 단 한번쯤은


내 볼에 비벼보고 돌아설 수 있었으련만


무에 그리 황망하여 서둘기만 했던지요


어이 그리 매몰차게 모질기만 했던지요


수도 없이 덮어주고 감싸주신 어머니 앞에


다시금 저지른 허물


깊이 속죄드린다는 그 한마디


끝끝내 전하지 못했네요


죄송해요, 어머니


미안해요, 어머니


어머니 자애의 품을 뒤로 한 이후


五欲七情 풍랑 거센 뱃길 떠돌며


피폐해진 채 퍽도 지친 여정이었습니다


무릇 산다는 건 고통과 동행하는 일


그리하여 참고 견디는 사바세상이라지요


번번 방향 잃어 헤맨 적도 숱했으며


좌초의 위기 겪기도 여러 차례


사는 일 곤고할수록


명주 피륙처럼 따스한 위로와


저물녘 종소리 같은 평화의 안식이 그리워


버릇처럼 어머니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서러울 때 부르는 이름


환난 중에 찾는 이름은


바로 어머니 당신이었습니다


어머니 그 이름은 가없는 희생이었습니다


아낌없는 헌신이었습니다


전부를 오롯이 내어주고 하얗게 비워내


드디어는


자식 위해 마지막 한 조각까지를 봉헌하신 어머니


사랑의 본질은 희생임을


사랑의 원형은 헌신임을


行으로 몸소 보여주신 어머니


마침내 완덕은


자기를 소멸시킨 다음에야 다다르는 곳이라지요


그렇게 본향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이제 억지며 투정 뉘에게 부려볼까요


노여움 접고 받아줄 이는 세상 어디에도 없네요


오히려 그 위치에 서있는 지금


어머니, 그래요


흰 카네이션 어머니 길을


저 그대로 닮아가고자 합니다.





흰나비


가게 안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들었다. 가끔 있는 일이다. 쇼윈도 주위에서 허둥대기 일쑤이던 다른 때와는 달리 벽시계 옆에 살포시 앉아 있는 흰나비. 한참 만에야 나래 펴고 가게 안을 나폴나폴 날아다니다가 이윽고 문을 나서더니 하늘로 사라진다. 가뭇없이 사라진다. 마치 환영처럼.


순간 시간을 확인한다. 한국은 그때 새벽 네시 반. 전화를 걸기에는 조심스러운 시각이다. 스치는 예감을 애써 떨구려 해도 심사가 뒤숭숭해 도무지 일손이 잡히질 않는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절한 인연이 이승 저 너머로 멀어져 가고 있음에도 속수무책인 채로 이국땅에서 조바심이나 내고 있는 자신. 속이 탄다. 저미는 가슴으로 무겁고도 깊은숨만 삼킨다.


결국, 노환으로 일 년 여를 손 놓고 지내시던 엄마는 그 하루를 못 넘기고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평생을 울 안에서 창밖만 바라보며 기다림으로 사신 엄마. 남편을, 자식을, 손주를 마냥 기다리기만 하신 엄마. 큰소리 내어 웃는 것도, 언성 높여 얘기하는 것도 뵌 적이 없는 천상 조선의 여인인 엄마는 솜씨 좋고 맵씨도 고운 분이셨다.


왜정 치하와 전쟁통의 궁핍상은 그 시대 모두가 겪었던 고통이라 쳐도 그에 더해 자유분방한 아버지로 인하여 마음고생까지 심하셨던 엄마다. 십자가를 아예 품에 사려 안고 자신을 소멸시켜 나간 인고의 삶, 태우고 다 태워서 하얗게 사위어 버린 온전한 봉헌이었다. 긴 세월에 걸친 이승에서의 보속을 마치고 향년 86세로 영원한 안식에 드신 엄마. 피안으로 가는 길, 넘치는 눈물의 강에 배 띄워 두둥실 떠나는 거라 해도 나는 또다시 엄마를 눈물로 전송하진 않겠다. 엄마는 슬픔에 잠긴 내 모습을 원할 리 없으므로.


엄마를 하늘 저 멀리로 떠나보내기는 이번이 두 번째다. 이제는 영영 보냈다. 처음 엄마를 하늘 높이 떠나보낸 것은 이태 전 일이다. 자그마하게 굽은 팔십 노구 이끌고 가로 늦게 시작한 막내딸의 이민살이가 궁금해 혼자서 미국엘 오셨었다. 모성의 힘이 아니라면 그 연세에 무리인 열세 시간의 긴 비행이다. 어려움 마다않고 오신 엄마건만 타국만리에서 행여 병이라도 나실까 봐 나는 내심 부담감부터 들었다.


더불어 호기롭게 미국으로 떠날 때와는 달리 피곤에 찌들어 사는 나의 일상을 고스란히 보여야 한다는 것이 신경 쓰였다. 아직 자리 잡히지 않은 어설픈 살림도 살림이려니와 빨래감에 묻혀 사는 딸의 행색에 엄마는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어떻게 키운 여식인데, 그저 하염없는 눈길로 안쓰러움 대신하며 쓰린 心曲 내색하지 않고 삭히신 엄마. 그 바람에 건강이 눈에 띄게 약화되자 와락 겁이 났다. 일정을 앞당겨 얼른 한국으로 귀국하시게 비행기 좌석을 서둘러 예약했다.


엄마… 괜찮겠어? 떨리는 내 목소리에, 걱정 말어… 안심시키던 엄마다. 그러나 출국장에서 말도 안 통하는 생판 낯선 미국여자에게 인계될 때 안 그래도 겁 많은 엄마는 속으로 얼마나 두려웠을까.


뉴욕 공항 보조원의 도움으로 휠체어에 의지한 채 기내로 향하며 엄마는 뒤돌아 뒤돌아 거푸 손을 흔들었다. 그 힘없는 손사래마저 눈물에 가리고 마침내 공항 벽에 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이러고 있어야 하는 건가. 내가 죄인이다. 나는 엄마에게 그럴 수 없는 죄인이다. 사무치는 회한으로 돌아오면서 내내 뜨겁게 속울음 울었다.


팔십 노모를 언니에게 맡기고 훌쩍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 나는 그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불효를 저질렀다. 그 이전에도 물론 이런저런 일로 누차 엄마 가슴을 아프게 한 딸이었다. 행복스럽게 사는 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엄마가 누릴 수 있는 최대 기쁨이건만 나는 그러하질 못했다. 해서 미안하다. 진작에 말하지 못해 안타깝고 이제는 직접 전할 수 없는 말, 그러나 꼭 해야 할 마지막 한마디, 엄마 정말이지 너무 미안해.


어째서 엄마는 언제까지나 엄마의 자리에서 떠나지 않을 줄 알았을까. 엄마는 언제까지나 내가 부리는 투정받아주며 그 자리에 항시 머물 줄 알았을까. 평소 무던하지 못한 내 성정 탓에 왈칵 내는 신경질이며 짜증에도 언짢은 기색 없이 가만히 받아주던 엄마. 노여움이나 서운함 접고 그저 고개 끄덕여 받아 줄 사람은 엄마 말고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다.


엄마가 가시던 날, 영결미사를 마치고 성당문을 나서는데 흰나비 한 마리가 나풀거리며 창천으로 날아오르더라고 조카가 전한다. 이모, 틀림없이 할머니였어. 할머니는 천사 되어 날개 달고 하늘로 오르셨어. 나비처럼 가벼이 아주 가벼이. 나는 한동안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나도 그렇게 믿고말고. 엄마 배웅 못하는 내 입장 헤아려 지상에서의 마감 여행으로 여식 찾아 오셨던 엄마. 나비에 혼을 실어 막내딸 얼굴 보러 가게에 들르셨던 엄마거든. 엄마는 나비처럼 훨훨 날아 하늘나라 천국으로 가셨음을 나는 믿는다.


또한 나는 굳게 믿는다. 죽음은 존재의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는 것을. 거울 속에서, 일상의 습관 중에서 문득문득 보게 되는 엄마의 모습. 엄마를 통해 내게 이어진 정직한 유전인자의 조화로 인해서다. 나와 내 동기 그리고 내 아이들의 피 속에 그 생명의 핵이 이어져 내려오므로 엄마는 영영 우리 곁에서 사라진 것이 아니다. 영혼불멸을 가르치는 신앙이 아니라도 나는 엄마가 늘 나와 함께함을 안다.


늦바람이 들어 사유도, 명분도, 목적도 뚜렷치 않은 미국 이민을 왔다. 우매한 내 눈으로는 짚히지 않으나 이 모든 게 하느님의 큰 계획 안에 준비되어 있던 일. 엄마를 하느님 품으로 인도하기 위한 우회적 방법으로 나를 여기로 부르셨다고 여겨진다. 삼십 년 佛者가 별 갈등 없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이라는 생활터전의 특성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 오묘한 하느님의 뜻이 임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미국 오기 전에는 하늘나라 여행길의 준비로는 수의와 영정 마련이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윤달 든 해에 명주옷 일습 짓고 여권 사진 새로 찍자고 둘러 대고는 한복 입혀 사진관에 모신 것이 오 년 전인가. 그런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가장 중요한 영혼 구원의 약속을 몰랐던 것이다. 환우患憂가 자꾸 깊어지자 마음이 급했다. 엄마 곁으로 돌아가 남은 여생이나마 엄마와 함께 지내보려 안간힘을 써봤으나 시도는 허사로 끝나버렸다. 그린카드 발급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 한국 방문도 여의치 않아 대신 전화로 언니를 재촉해 지난봄 세례를 받으시도록 주선을 했다. 영세를 받으실 때 엄마는 긴 여정의 짐을 다 내려놓은 편안한 모습으로 말씀을 영접하시더라는 신부님의 전언이 요즘의 내게 더없는 위로가 된다. 또한 든든한 빽이기도 하다.



하느님, 정녕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우리 엄마를 제 엄마자리에 있게 해 주심을요.

모쪼록 바라오니 일생을 기다림으로 산 우리 엄마, 더 이상의 외로운 기다림 없는 천국으로 인도해 주소서. 그리고 엄마 계신 곳 밝은 빛 환하게 비쳐 주소서. 엄마는 소녀처럼 수줍음도 타지만 겁이 많아 무섬증을 잘 타거든요. 또 한가지 부탁은 나중에 저 꼭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있게 해 주세요, 하느님.

오직 통회의 기도만을 바쳐야 할 염치없는 죄인이 중언부언 무슨 말이 이리 많단 말인가. 참괴 또 참괴. -2004. 9-

























































































 


 




 




  




 




 




 




 




 





 


 


 




 




 


 




 




 







작가의 이전글 여로(旅路), 그리고 Apres cela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