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May 07. 2024

여로(旅路), 그리고 Apres cela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불리는 강이 있어요. 사랑은 그 강을 항해하는 여행자….’ 마릴린 먼로가 쉰 목소리로 호소하듯 부르던 노래 '돌아오지 않는 강'을 절로 떠올리게 하는 거친 물소리. 강폭이 꽤 넓다. 버드나무가 연둣빛 머리채를 나붓대는 그 아래로 희뿌연 강물이 빠르게 흘러간다. 강심도 깊어 보인다.



미 서북부 케스케이드 산맥에서 흘러내린 빙하다. 그 강가 양안에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뤘다. 스멜트라는 고기를 잡기 위해서이다. 현지 한인들은 양미리라 부르는데 은어 비슷하게 생긴 빙어과의 작은 어종이다. 바다에서 살다가 산란기가 되면 강으로 올라와 알을 낳은 후 생을 마친다는 점에서 연어의 일생과 흡사한 모천회귀성 물고기이다.



이쪽저쪽 강 언저리에 죽 늘어서서 뜰채질에 열심인 사람들. 마치 사금 채취라도 하는 듯 다들 들떠 있다. 예전 한때 골드러시를 이룬 서부의 어느 강가인 양 신명 나게 그물채로 고기를 건져 올리기에 몰두해 있다. 표정들이 꽤나 즐겁다. 묵직해진 그물을 양동이에 연신 쏟아부으며 떠들썩하니 흥이 나기는 남녀노소 백인 한인이 따로 없다.



오랫동안 자취를 감췄다가 십 년 만에 다시 모습 보인 賓客 스멜트란다. 여울물 소리도 요란스러이 흐르는 강물 거슬러 힘겹게 헤엄치는 고기떼가 수면 바로 아래 거무스레 드러난다. 날랜 몸짓으로 무리 지어 항해하는 꽁치 떼 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개중에는 이미 기진맥진 상태로 배를 보인 채 거친 물살에 밀려 허둥대고 있다. 몸체 여기저기 나있는 상흔. 온 목숨을 내건 처절한 사투를 치른 병사 같다. 쯧쯧, 얼마나 힘에 부치는 여행길이었으랴.



Apres cela, ,프랑스 말 아프레 쏠라는 그 다음은?이라는 질문어라고 한다. 나름 각각 학업에 매진해서 좋은 직업을 갖고자 하거나, 재능 연마하여 발군의 실력으로 성공적 삶을 쟁취하고자 노력한다. 저마다 숱한 계획들을 세우며 원대한 꿈을 성취하고자 애를 쓰나 하나를 이루면 더 높은 목표를 또 세운다. 신기루 같은 이상을 좆느라 매일매일을 현실에 급급하며 바쁘게 살아온 삶. 그렇게 달려 끝에 이르면 그 다음은? 생명 부여받았던 우리는 너나없이 모두 어디로 떠밀려 가는 것일까.




그전에 딸아이로부터 받은 편지 구절이 떠오른다. 어학연수차 북미에 머물던 지난해 늦가을, 대학 캠퍼스 안을 지나는 강에서 연어 떼를 만났다고 한다. 신기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 연어의 몸이 아주 엉망으로 망가진 데다 머리 부분은 거의 너덜거리는 흠집 투성이더라고 했다. 수없이 험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바윗전에 부딪히기도 하고 폭포를 뛰어오르기도 하다 난 상처일 시 분명하다. 그뿐이랴. 바다에서 모천으로 돌아오는 마지막 여행길, 때로는 곰의 사냥감이 되거나 날렵한 물새에게 채인다. 길목 좋은 곳에선 낚시꾼이 기다린다. 그럼에도 하늘의 섭리대로, 본능이 이끄는 대로, 부화를 위해 태어난 강으로 다시 돌아와 저마다의 갸륵한 한 생애를 마친다는 연어.



그처럼 스멜트도 위대한 역사를 마무리 짓고 하염없이 떠나가는 중이다. 속이 다 빠져나간 훌쭉해진 배를 한 채로. 눈은 또랑하나 이미 초주검 상태인 스멜트. 몸을 가누고 물살 거슬러 헤엄치는 녀석들도 생기 넘치는 힘찬 기백은 이미 사라지고 그저 살아 있음을 증명하듯 조건반사적으로 꼬리를 흔들 따름이다. 그렇게 떠밀려 가다 한 무더기씩 뜰채에 걸리고 재수 좋게 피해 간다 해도 이번엔 갈매기 먹이가 된다. 게다가 산란이 끝난 고기는 하천에 이르러 어차피 숨을 거둔다고 하니, 세상에 존재했던 흔적을 살뜰히 다른 생명체에게 육신 공양하고 떠나는 스멜트의 마지막이 한편은 숙연하다.



처음엔 그물에 갇혀 몸부림치는 스멜트의 안간힘이 자못 처연해 옆에서 건네주는 뜰채를 넘겨받을 엄두도 못 냈다. 한참을 안쓰러움으로 연민의 시선만 보내다가 일행의 재촉에 밀려 마침내 나도 그물질을 하기 시작했다. 손잡이가 긴 뜰채다. 물살은 아주 빠르다. 힘이 부친다. 강물에 몸이 쏠린다. 힘껏 뜰채를 거둔다. 묵직하게 들어찬 스멜트. 점점 재미가 난다. 그렇다고 한정 없이 잡아서는 안된다. 일 인당 허가량이 십 파운드로, 초과 시 벌금이 오백 불이라 한다. 몇 번의 그물질만으로 그 양은 수월하게 채워진다.



요셉은 여기서 종종 바다낚시를 간다. 그때  동승한 어업국 직원이, 잡은 고기의 크기며 무게는 물론 어느 위치에서 몇 시에 잡았는가를 꼼꼼히 물어 기재하더라는 것이다. 어종 보호는 물론 바다 생태계의 정확한 데이터 자료를 만들기 위해서다. 주정부의 앞을 내다보는 지혜로운 조치일 터. 그에 반해 우리는 몇 년 전, 한일 간의 어로 협상 당시 바다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해양수산부 대표로 나앉아 쌍끌이가 무슨 말인지조차 몰라서 망신을 당했다던가. 그러니 어느 바다에서 무슨 고기가 잡히는지를 알 턱이 있으랴. 철저히 대비하는 행정이 못되면 어민들의 의식이라도 깨어 있어야 할 텐데 그도 아니다. 바다 밑을 훑듯이 마구잡이 그물질로 치어까지 잡아 씨를 말리는 데다 중국 배들마저 얼쩡대는 통에 수자원 고갈을 염려하는 지경에 이른 우리, 안타까운 노릇이다.



어둠살이 낄 무렵 거처로 돌아와 고기를 다듬었다. 생김새도 그리 먹음직스럽지 않은 데다 해캄 내가 난다는 스멜트는 꾸들꾸들 말렸다 통째로 튀김을 한다고 한다. 비늘을 치고 내장을 손질해 나가는 동안 손끝 느낌만으로도 암수 구분이 확연했다. 조직이 좀 단단한 것은 수컷, 암컷은 살이 무르다. 대역사를 치른 후라서 한결같이 속은 텅 비어있다. 어느 한 마리도 알을 품은 채로 잡힌 것이 없다. 주 정부 어업국에서 산란기를 정확하게 계산, 때를 맞춰 일단 알을 낳고 난 다음 죽음에 이르기 전 잡을 수 있도록 허가를 한 까닭이다. 그들의 빈틈없는 합리성이 부럽지 않을 수 없다.



고기를 채반에 너는데 전나무 숲으로 여울물 소리 같은 바람이 지나간다. 마릴린 먼로의 애조 띤 목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 불리는 강이 있어요. 인생은 그 강을 항해하는 여행자......' 환청인가. -2001-


작가의 이전글 페이지에서의 이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