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장이 대체 몇 개?

by 무량화


강원도 고성 주상절리대를 보러 갔다가 이승만 별장을 스친 적이 있다.

별장이라는 이미지와 달리 조촐한 단층 건물이었다.

다만 돌로 지어서인지 벙커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1954년에 건축해 1960년까지 사용했다는 이 건물의 위치로 미루어 후대인들이 별장이란 호칭을 붙였지 싶다.

말이 호숫가 별장이지 전후 극도로 어수선했던 당시 전방 시찰 시 사용된 숙소가 아니었을까.

근처엔 독일 건축가가 돌을 이용해 독일의 성채같이 지은 이층 집이 있는데 김일성 휴양지였다고 한다.


고성 화진포 숙소


또 한 곳은 창원 이승만 대통령 별장인데 진해 해군통제부 내에 있는 건물이라 사진으로만 보았다.

일제강점기 일본군 통신대가 사용했던 건물로 광복 후 해군에서 인수하여 수리해서 별장으로 사용하였다.

한국으로 리턴한 뒤 정착할 곳으로 태를 묻은 고향을 꼽았으나 이미 산업단지와 화학단지가 활성화된 지역.

청풍명월(淸風明月)로 상징되던 예전과 달라진 환경이라며 친지들이 공해가 심하다고 이주를 말렸다.

아들이 있는 부산에서 이태를 살며 부산 골목골목 훑고 다니다가 부산임시수도기념관에 들렀을 때다.

1950년부터 53년까지 한국전으로 부산이 임시수도였을 당시, 경남도지사 관사였던 건물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한 적이 있다.

그 기념관에는 부산의 역사를 비롯해 이박사 부부의 유품과 관련자료 등을 상설 전시했다.


진해 관사

부산 골목기행도 시들해지자, 이참에 전국 유람하며 각 지역에서 일 년씩 노매드되어 지내보기로 작정했다.

남한 지도를 펴놓고 가까운 경주 안동 영주 강릉에 방점을 찍어놓았다.

하긴 지리산 자락이나 설악산 주변도 괜찮을 거 같아 고려대상에 추가시켰다.

유목민 되어 자유로이 떠돌며 살 참이면 먼저 제주 일년살이는 어떻겠느냐고 아들이 권했다.

옳다구나 손뼉을 치고 제주섬 두루 관망해 보니 상대적으로 온화한 남쪽이 좋겠다 싶어 서귀포를 택했다.

내 입장과 조건에 가장 합당한 곳, 사통팔달 교통 편리한 입지인 서귀포 중심부가 눈에 들어왔다.

우선 도심이라 교통편 다양하고 밤에도 밝고 안전하다는 이점 외에도, 발치에 바다가 푸르게 깔려있으며 한라산 용체 그 어디서보다 장엄하면서도 멋진 미태를 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여기였다.



오자마자 정방폭포며 자구리해안, 천지연과 새연교를 내 정원이자 산책지로 삼았다.

이렇듯 갑자기 재벌 이상 가는 홍복이 안겨져 매일을 감탄사 발하면서 지냈다.

무슨 공덕으로 이런 축복 누리나 그저 생광스러워 감지덕지 합장할 따름.

평화롭고 자유로운 일상에 수시로 감격하며 암튼 내 삶의 보너스 같은 화양연화를 충만히 누렸다.

자주 자립 자유, 행복감은 이 세 가지가 충족되므로 느끼게 되는 원초적 상태의 순수 감정이다.

스스로 주체가 되어 결정하고 행동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며, 누구의 간섭이나 아무런 구속감 없이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은 채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 자유가 너무나 소중해 하늘에 거듭 감사드렸다.


일 년만 살려던 애초의 계획은 계속 수정됐다.

둘러볼 곳이 무진장인 데다가 한번 찾은 장소라도 계절별로, 새벽 시간대 혹은 노을질 무렵, 눈이나 비가 올 때 등등 다시 가볼 이유야 숱했다.

남들 다 하는 올레길 완주는 틀에 매이는 게 성정에 안 맞아 여기저기 마음 내키는 대로 자재로이 드나들기만 했다.

산으로 바다로 들로 한창 쏘다니던 중, 80년대 인기 신혼여행지인 파라다이스호텔 경내 화락원을 알게 됐다.

처음 여기로 안내했던 길벗의 설명인즉, 피폐하기 짝이 없던 시대에 옥외 풀장까지 갖춘 이 따위 호화판 별장을 지은 인간이라며 험한 말로 이박사를 매도했다.



1959년 국영 시설로 지어진 이곳은 이박사 실각 후 정부 소유였다가 파라다이스 그룹이 매입해 대대적인 개보수 작업 끝에 파라다이스호텔로 변신했다.

이후 이승만 별장이라는 주건물인 화락원은 대숲 어둠 속에 가려져 버렸으며 온갖 억측만 난분분.

역사는 철저히 승자의 기록이다.

군사혁명으로 과도정부를 밀어낸 쿠데타 세력은, 하와이에서 망명생활 중인 이박사를 끝내 외면했다.

결국 모국에 돌아오지 못한 채 노환으로 눈 감은 이박사.

화락원이 그의 겨울별장이라고 알려지며 지탄의 대상이 되어야 했으나, 가난한 신생국가수반으로 따는 외교사절 맞기 위한 접대용 영빈관 역할을 한 장소일 수도.

그뿐, 한국전 치르느라 힘겨웠던 대통령 자리인데 철 따라 별장 옮겨 다니며 음풍영월 일삼을 만큼 당시 상황이 태평천하였나?



한진그룹은 2008년 파라다이스 그룹으로부터 이 호텔 부지와 건물 전체를 사들였다.

잘 가꿔진 정원, 거친 회벽에 담황색 기와를 인 낭만적인 건축물로 이국 정취 가득한 스페인풍의 긴 회랑이 인상적이다.

지인들이 서귀포를 방문하면 꼭 들르는 인생샷 건지는 포토 스팟으로 다들 만족스레 여기는 장소다.

현재는 전망 좋은 절벽 바로 위, 마치 로열박스처럼 생긴 절경지에 위치한 동 건물에는 허니문하우스라는 카페만이 성업 중이다.

인근의 건축미 수려한 소라의 성은 비밀의 베일에 가려져있으나 건립연대로 미루어 박정희 별장으로 파악된다.



나에게 각인된 이박사 이미지는 자상하고 인자로운 머리 하얀 할아버지상일 따름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80회 생신을 축하하는 글짓기 대회에서, 일찌감치 한글을 떼긴 했지만 국민학교 1학년 생이 무슨 글을 썼던지 도에서 하달된 큰상을 받았다.

언니 기억으로는 교장선생님 호명으로 전교생 앞에 나가 상을 받는 아우가 무척 자랑스러웠다고.

그 인연 때문일까, 1960년 떨리는 목소리로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습네다"는 담화를 발표하던 날도, 이화장에서 나와 하와이로 떠나던 날도 어린 내 눈에선 눈물이 샘솟았다.

부산임시수도기념관에서 검박하게 산 이박사 전력을 들은지라 사치스러운 파라다이스호텔을 별장이라 못 박기에 화락원의 실체를 들며 적극 이박사를 변호하기도 했고.



서귀포로 이주한 지 네 해나 흘러서야 드디어 또 한 곳, 이승만 별장으로 알려진 송당의 귀빈사를 방문하게 되었다.

화락원에 얽힌 역사의 진실 규명이 여러모로 모호한 상태라, 화락원 이전인 1957년에 건립된 송당별장이므로 어떤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서였다.

몹시도 궁금했던 마음과 달리 방문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교통이 외진 데다 혼자 방문하기엔 휘휘한 장소라 내동 벼르기만 하면서 여태껏 못 가본 그곳.

마침 지인 한분이 기꺼이 역사탐방에 동행해 준 덕에 구좌로 향하던 날.

이른 아침부터 기대감에 들떠 흥분해서인지 심장이 콩닥거렸다.

맑게 갠 하늘에 먹구름 모여들더니 중산간을 달릴 즈음엔 집중폭우가 쏟아졌다.

어쨌거나 그래도 이미 기분은 낭랑 십팔 세로 돌아가버려 마음은 하냥 부풀어 올랐다.

나이 상관없이 말랑해진 감성, 무지개를 보면 가슴이 뛴다던 워즈워스처럼 말이다.

My heart leaps up.....



1킬로 남짓 곧게 뻗은 삼나무 숲길은 널리 정평이 난 명품길이다.

웨딩촬영 차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는데 궂은 날씨라 우리 외에 인적 전혀 없어 적요하기만 한 길.

하늘 바라며 창창하게 솟구친 삼나무들의 도열을 받으며 쪽 고른 길을 보무당당히 행진하듯 걸어 나갔다.

귀빈사 향해 걸으며 한 번씩 뒤돌아 보면 저 멀리 소실점 아물거리는 신비로운 숲길 가히 환상적.

같이 동행해 준 지인께 감사하다며 손 모아 거듭 인사할 만도 했다.

아 좋다~를 연발하며 평화로이 걷다가 왼편짬에서 선명한 안내문을 발견했고 그 길로 접어들자 귀빈사였다.

심호흡으로 마음결 가다듬고 숲향기부터 음미해봤다.

피톤치드가 숲의 정령처럼 스며들었다.

먼저 마중해 주는 12미터 높이의 노거수 퐁낭 늘어진 가지를 지지대가 받들고 서있었다.

눕듯이 휜 줄기 사이로 밀밀한 숲에 싸 안긴, 폐가 수준의 허름한 귀빈사 전모가 드러났다.

눅눅히 비에 젖어 분위기 한층 침체되긴 했으나 혼자였다면 접근할 용기 과연 있었을까.

그만큼 우중충하게 낙후된 건물, 등록문화재 제113호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란 명패가 무색했다.

오랜 세월 방치되다시피 했으나 그나마 십여 년 전 제주시 차원에서 안팎 정비를 다시 하였다고 한다.

삼나무길과 연계해 귀빈사를 처음대로 완벽하게 복원 복구시켜 보다 쾌적하게 관리를 잘해서 관광 자원으로 활용하면 괜찮으련만 여전히 주민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은 모양.

찬/반 세력은 언제 어디서나 반반이다.

예수님 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도내 최초의 근대주택이자 국가 원수와 관련된 역사현장 관리가 이 정도로 부실한 데는 이유가 있다.

4.3 사건 당시 수만 명의 양민이 희생된 책임을 이박사에게 돌리는, 아직도 굴곡진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제주 민심의 단면이리라.

축산 부국을 일궈내려던 의지로 송당목장의 기틀을 다진 상징적인 공간이기도 한 귀빈사(貴賓舍).

이박사만을 위한 거처가 아니라 제주를 찾는 외국 귀빈을 모시는 집이란 뜻도 아우른 건물이다.

이곳 응접실 정면 벽난로 위에는 상징적으로 소머리 조형물이 있는데 그 까닭도 송당목장과 연결돼 있다.

미 8군 사령관으로 6·25 전쟁을 진두지휘한 밴플리트 장군은 퇴역 후 플로리다주에서 목장을 경영했다.

1956년 한·미재단 고문으로 한국을 자주 찾았던 그는 제주도에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의 목장을 만들자고 이 대통령에게 제의했다.

"우리 국민들도 이제는 소고기를 먹어야 합네다" 약조한 이박사는, 구좌읍 송당리 민오름 일대 초지를 국립목장 부지로 결정했고.

이어서 농림부는 송당목장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송당목장은 그렇게 1957년에 조성된 900만 평 규모의 대규모 육우 목장으로, 조성 당시의 이름은 ‘국립 제주도송당목장’이었다.



플로리다주에서 사육되던 브라만종 소 166두가 성산포항으로 들어와 송당목장에 방목됐다.

밴플리트의 협조로 트랙터와 경운기 등 축산 농기구도 함께 수입할 수 있었다.

그는 왜 한국에 이리 각별한 진심을 보였을까.

밴플리트 장군이 미 8군 사령관에 오른 시기의 한국전 상황은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유엔군이 후퇴하여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때였다.

그의 아들 밴플리트 2세도 부친을 따라 한국 파병을 자원해 B-26 폭격기 조종사로 1952년 한국에 왔다.

적지 폭격임무를 수행하려 출격한 밴플리트 2세의 폭격기는 귀환도중 황해도 상공에서 격추되고 말았다.

특수부대의 수색작전이 진행되었으나 아들의 생사 확인을 위해 다른 이들의 소중한 생명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는 장군의 지시로 수색은 중지되었다.

밴플리트 2세는 부상당한 채 북한측사로잡혀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포로생활을 이어가던 중 사망했다.

이들 경우만이 아니라 142명의 미국 장성 자제들이 한국전에 참전하여 35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아빠 찬스를 이용하기는커녕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조차 한국전에 투입됐는데 같은 위치일 때 한국인 부모라면?

전쟁 기간 중 미 8군 사령관을 역임한 네 명의 사령관 중 가장 오랜 기간(51년 4월~53년 2월) 미 8군을 포함한 전체 유엔사 지상군을 지휘한 장군이었던 그.

외아들이 목숨 바쳐가며 자유를 지킨 이 땅에 대한 장군의 연민 어린 사랑은 그 후에도 변함없이 극진하기만 했다.

미 육사의 학제를 본 딴 4년제 육사를 설립하였으며 한국의 전후 복구를 위해 외자를 유치하여 울산 공업단지가 건설되도록 주선하였다.

한국과 미국 민간교류의 상징인 뉴욕의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도 1956년에 그가 창립한 단체다.



원래 명칭은 귀빈숙사였는데 귀빈사로 변경된 이 건물은 43평 짜리 단층건물이다.

이승만별장으로 불리고 있으나 외국에서 오는 귀빈들의 전용숙소로 이용하기 위해 건립됐다.

건물 외벽에는 두 가지 기쁨이 동시에 이루어지기를 기원하며 ‘쌍 희(囍)’자를 돋을새김 하였고, 계단에는 모든 일이 뜻대로 오래 이어지기를 기원하는 회문(回紋)인 연속무늬를 제주 돌로 박아놓았다.

당시 이대통령이 딱 두 번 사용했던 다섯 평 정도의 침실에 침대, 응접실에는 벽난로가 있으며 수세식변소와 욕조, 주방에는 냉장고, 가스레인지 등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돼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에서 설계를 담당하고 독일에서 공수해 온 자재를 써서 국군 공병단이 지었기에 균열이나 고장 없이 이제껏 모든 게 건재하고 있는지도.

독일 수도원에서 보았던 법랑 재질의 싱크대가 설치된 주방은 찬장까지 백년 세월에도 하자 없이 튼실했다.

응접실에서 방으로 이어지는 쪽마루 바닥에 강판유리가 깔렸던데 추측 건데 지하 방공호 시설과 이어지지 않았을까 싶었다.

살얼음판 같은 흉흉한 세상인 데다 제주도라는 지역적 특성상, 이박사 내외는 아침 산책 삼아 뜰에 나와서 이 청신한 숲의 푸른 바람결 호흡해 보았을지.

두 분이 손잡고 한유로이 거닐만한 여건이 전혀 아니었던 당시, 더구나 이박사는 손자뻘 경호원을 좀 쉬게 하고 싶어했으리.

남로당 빨치산 잔당 마지막 토벌전은 1954년 8월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이 완료되면서 끝이 났다지만 사실 얼마나 험악하던 그 시절이었던가.

내가 국민학교 다닐 적만 해도 산간에 숨은 빨치산들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가 헬리콥터로 하얗게 뿌려지던 세월이었다.

그뿐인가, 덕유산에서 아군과 격전 끝에 총상을 입은 적의 시신이 거적데기에 덮여있는 사진을 신문에서 보기도 했다.

1963년 11월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 총상 입고 체포되기까지는 휴전 후 십 년이나 흐른 세월이었 듯이.

그렇다. 오늘날까지도 좌와 우로 편 갈려 싸우듯 안타깝게도 이 나라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가, 이념이며 사상이 대관절 뭐관대....

그래서 정결하고 순수한 사랑을 난 지금도 꿈꾸는가.



https://brunch.co.kr/@muryanghwa/1941


https://brunch.co.kr/@muryanghwa/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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