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슨새미오름
송당목장 귀빈사에 갔다가 민오름은 패스했다.
폭우를 몰고 다니는 검은 구름장이 허공에 진을 치고 있어서였다.
검푸르게 이어진 비밀의 숲 삼나무 터널길조차 인적 뜸한 날이라 민오름 산행은 아무래도 저어 됐다.
말굽형 굼부리가 패어 있으며 완만하게 이어지는 두 개의 등성으로 이루어졌다니 시간도 제법 걸리겠고 비도 염려스러웠다
대신 바로 길 건너 거슨새미오름 입구로 돌아왔다.
이정표대로 비자림로를 달려, 표시된 파킹장이라고는 여기뿐이라 멈춰 섰던 곳.
뒤편 오름이 비교적 밝고 낮으막해 걷기 훨씬 만만할 거 같았다.
숲에는 비안개 바삐 달려가면서 오름 자태 아슴아슴 떠올랐고 공기는 습습했다.
비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기세였다.
눈물 잔뜩 그렁그렁한 채 여차하면 울음보 터트릴 아이처럼 물기 축축이 머금은 숲.
오름 안내 지도를 읽고는, 어차피 조망권이 트이지 않는 우중이라 정상 제치고 둘레길을 따라 걷기로 했다.
굼부리에 샘이 솟는데 그 물이 거슨새미, 물길이 연어도 아니고 어찌 거슬러 흐를 수가 있을까?
물은 아래로 흐르게 마련인데 이 샘물은 반대로 한라산 향해 거슬러 흐르니 혹 반역의 기운이라도?
지형이 이상한가 도대체 물이 왜 거꾸로 흐르는지 호기심은 일었지만 꾹꾹 눌렀다.
더구나 그 달고도 맑은 물은 목초지 우마만이 아니라 과거 정의현에서 제주목을 오가던 옛사람들의 갈증을 달래주던 단물이었다니 만나보곤 싶었으나 다음으로 미뤘다.
겨우 오름 초입인데 벌써부터 비꽃이 날리기 시작했으므로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둘레길로 접어들었다.
비자림이 가까운 덕일까.
숲 전체가 어린 묘목부터 제법 성목이 된 나무까지 비자나무 천지였다.
그렇게 송당리 주민들이 비자나무 산림욕장을 가꿔가고 있기에 한 십 년 뒤에는 제법 어우러진 비자숲 향기롭겠다.
조림지인 비자림에 이어 쭉쭉 뻗은 편백나무가 위엄차게 솟아 사열을 하듯 받들어 총! 자세다.
천연 항균물질인 피톤치드 뿜어내 이 산마을이 푸르게 정화되고 점차 확산돼 제주 전체 나아가 세계가 정화될 수 있다면.
둘레길이라지만 제법 오르내림이 심한 산세, 길 옆 산자락에서 꽃처럼 고운 버섯이며 독초 천남성도 만난다.
흙길 숨 가쁘게 걷는 와중에 갑작스레 소낙비가 쏟아진다.
그래도 숲 울창해 비를 막아준다 싶었는데 이윽고 온 숲이 비에 흠씬 젖어 굵은 물방울을 투두둑 떨군다.
우산도 준비 안 된 채라 곱다시 비를 맞아야 할 판이다.
올 구월 제주 날씨는 유난스레 변화막측, 요란을 떤다.
바람 쾌청해 창문 죄다 활짝 열어두고 외출한 날 이리 변덕을 부리면 난감해진다.
하늘 멀쩡하다가도 느닷없이 검은 구름 떼거리로 몰려와 국지성 호우를 쏟아붓기 일쑤인 요즘이다.
와장창 뇌성벽력도 수시로 날려 겁먹게 한다.
그것도 꼭 한밤중에만.
낮에는 이렇듯 심한 폭우로 산간계곡에 갇히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한다.
할 수 없다.
삼십육계 줄행랑만이 상책이다.
저만치 쉼터가 보이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조건 달음질친다.
한숨 돌리고 나서야 도반이 배낭에서 비옷 한벌을 찾아낸다.
둘이 하나 되어 비닐옷에 의지한 채 한쪽 어깨만이라도 겨우 비를 피한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
하긴 뭐 궁하면 그럴 수도 있지.
비는 줄기차게 내린다.
난타하는 빗줄기의 리듬을 음미하면서 발걸음 나란히 무상 무심 상태로 걷고 또 걸어간다.
스스로의 존엄성을 인식한 사람이라면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 법.
또한 성숙한 인격체라면 천부적인 인간 존엄의 불가침성을 인정 수긍하고도 남을 터이다.
급한 와중에도 기상 탓에 여러 생각들이 교차된다.
그렇게 제식훈련받듯 도반과 발자국 하낫 둘 맞춰가며 부지런히 반쯤은 뛰듯이 걷는다.
혼자 있을 때에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삼가는 것을 신독(愼獨)이라 한다.
이는 퇴계 선생의 좌우명이다.
하물며 둘임에랴.
도반일지라도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언행을 삼간다는 근신과 통하는 묵직한 그 단어를 되새긴다.
붕우유신, 길벗 사이에도 예는 물론 신의를 지키며 이를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존경심도 익어간다.
주차장이 보이나 거슨새미오름 생태관에 들러 비도 피할 겸 행장 추스르고는 전시품들 둘러본다.
전시물을 통해 이 부근에 오름이 무척 많이 분포돼 있음을 알 게 된다.
안돌오름과 밧돌오름을 시작으로 민오름, 칡오름과 주변부에 거친오름, 아부오름, 다랑쉬오름, 백약이오름, 용눈이오름 등이 울멍줄멍 솟아있다.
저 오름들은 하늘 맑고 푸른 가울날 찾아볼 것이다.
그 외 사진 패널 속의 꽃을 보긴 했는데 이름 모르던 식물인 절굿대며 생소한 새 이름 되뇌어가면서 꼼꼼히 전시실 한바퀴 빙 돌아봤다.
창밖 빗발 점차 수굿해지기에 생태관을 나와 우리는 차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