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산책 1

비에 젖은 석물, 동화마을

by 무량화


연달아 폭우가 쏟아지던 날.

동화마을은 더욱 붐볐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비 죽죽 내리는 관광지에서 하릴없이 숙소에 죽치고 있기란 갑갑도 하거니와 허비하는 시간이 아깝다.

해서 죽창처럼 내리 꽂히는 빗발 뚫고 꾸역꾸역 차들이 밀려든다.

동쪽으로 길을 잡았다가 차창 뿌옇게 가리는 비에 쫓겨, 비도 피할 겸 점심도 해결할 겸 들렸다.

그렇다고 생판 우연스레 들린 것은 아니다.

지난봄, 고향 친구들이 제주여행 왔을 적에 자녀들이 꼭 가보라고 추천했다기에 일부러 찾았던 곳이다.

자연 탐방만으로도 갈 곳 넘치게 많은 제주라 인위적인 공간은 잘 안 가는 편인데 친구들과 일단은 동행했다.

꽃철이 아니라서 그랬던지 각양각색의 석물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이번 방문에는 나름 뜻한 바가 있었다.

두 사람의 여행 이야기인 어린 왕자 동화는 여전히 그저 먼 이상(Ideal) 일 따름인가.

이상주의자의 환상에 지나지 않는.

물론, 어른들이 점점 잊어가는 인간적인 가치와 순수한 감정을 일깨워주면서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관계의 소중함을 풀어낸 어린 왕자다.

비록 어린 왕자가 높은 언덕에 올라갔어도 찾는 것을 볼 수 없었고, 자기 목소리의 메아리만 들을 수 있었다지만.

그럼에도 어린 왕자의 동화를 현재에 대입해보고 싶었다.

진작에 고갈 돼버린 순수한 감정을 다시금 되돌릴 수는 없는 걸까.

티끌만 한 흠결도 없이 아무런 때도 타지 않은 그런 순수성, 어쩌면 지고지순한 감정을 회복해 본다거나 스스로를 정화하고 싶었서였을지도.

별을 사모하고 풀꽃을 사랑했던 그 옛적 순수시대.

지금은 몸도 영(靈)도 그때로부터 너무나 멀리 떠나와 버렸다.

나이 든다는 것은, 늙는다는 것은, 메말라가거나 낡아가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종심(從心) 나이를 넘긴 지도 그럭저럭 여러 해.

그러나 논어 가르침대로 從心所欲不踰矩(종심소욕불유구)는 언감생심이니.

모든 욕구가 자연스럽게 도덕과 양심의 기준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상태를 감히 내가?

그런 완벽한 대자유의 경지를 터득하기엔 인격 한참 모자라는 미성숙한 사람이 나이기에.

미묘하게 반응하는 감정과 감각으로부터 초탈한 참 자유인이 되고 싶다.

비에 젖어 더욱 검푸른 현무암, 무정물인 돌들의 표정을 닮고 싶어 비안개 속을 배회하나 유정물에게는 요원한 바램일까.



다시 세차게 내리는 비.

떠밀리듯 인파로 복작대는 커피집에 들어갔다.

초대형 매장인데도 도떼기시장처럼 붐비는 카운터 대기 줄은 구불구불 길었다.

따뜻한 차를 주문하고 먼저 이층으로 올라갔다.

통창 너머 직사각형 프레임에 담긴 정원 풍경이 운치로웠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젊은이들, 왜 뒷모습은 젊고 늙고 상관없이 고단한 삶의 무게감이 느껴질까.

남녀를 막론하고 뒷모습은 어쩐지 쓸쓸하다 못해 고적하게 보일까.

턱이라도 고이고 있다면 깊은 상념에 빠진 듯 자못 현학적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뒷모습....

그나저나 기온 낮은 데다 바지 아랫단도 비에 젖어 으슬으슬 추웠다.

두름성 없이 덧옷 하나 챙겨 오지 않았으니 어쩌겠나, 타인 시선 아랑곳 않고 타월을 어깨에 덮었다.

그나마 온기 보탠 데다 따스한 찻잔 양손으로 감싸 쥐니 한결 추위가 눅어졌다.

옛말 하나 그르지 않다더니 맞다.

바로 엊그제까지만 해도 덥다 덥다 아우성쳤는데 어느새 춥다 소리가 나오는 걸 보나따나.

정말이지 올여름 불볕더위는 겁나 무지막지했다.

지구환경이 기후 변화로 물구나무를 선채 제자리 착지를 잃어버려, 영영 폭염이 사그라들 것 같지 않은 위기감마저 들었다.

그만큼 폭염 위세는 대단했고 최장기 지독스런 열대야도 경험한 올해였다.

하지만 종말에 이르지 않는 이상 순환의 질서는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 절기에 따른 변화는 어쩌지 못하는 철칙이다.

밤 길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추분이 어제였다.

바야흐로 본격 가을이 오면서 일교차가 심해지나 한낮 늦더위 아직은 기승부리는 구월이다.

먼바다 태풍 여파로 비 오락가락하면서 더러는 집중호우를 쏟아붓기도 하는 변덕스러운 요즘 날씨.

이런 날은 세사로부터 벗어나, 오롯하게 자신의 내면을 챙겨보는 사색에 깊이 잠겨봐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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