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를 쓴 여자

1990

by 무량화


모자로 멋 내기를 즐겨하는 아내와 그 남편의 실랑이 한 장면, 어느 드라마에서다.

“못 벗어? 그럼 외출 계획 취소.”

“모자 쓴 게 어때서요. 내가 너무 돋보여서 튈까 봐 그래요?”

“어쨌든 난 온 전신이 스물 거려 싫다구.”

대충 이런 대사였을 것이다. 한껏 멋 부리고 부부동반 나들이를 하려다 빚어지는 마찰 장면이다.

아내의 짧은 스커트도, 갈매기 꼴 눈썹 문신도 다 양해하는데 장식 모자만은 왜 편안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걸까.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거부반응을 보이는 모자 착용, 아마도 익숙지 않다는 점과 아울러 남의 눈에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요즘 모자가 부쩍 유행이다. 계절이나 나이와 관계없이 모자를 쓴 여자가 늘고 있는 추세다.

특별한 모양의 장식 모자를 척 쓰고 다닌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니라면 엄두를 못 냈는데 이젠 대수로운 일이랄 수도 없다.


모자가 보편화되면서 종류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중절모의 변형에서부터 별별 모자가 다 있는 것이다. 터번 모양에다 베레모 종류도 가지가지다.

뿐 아니라 운두가 높고 낮은 맥고모자에다 챙이 있는 것, 없는 것, 벙거지 꼴이며 러시아인의 털모자 닮은 형, 소공녀가 씀직한 하늘거리는 레이스 모자 등등.



모자는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나 추위 더위를 막고자 머리에 쓰도록 만든 쓰개라고 풀이돼 있으나 그보다는 멋에 비중을 두는 게 사실이다. 모자는 소품이지만 대단한 변신을 가능케 해 준다.

분위기 있는 여자로 만들어 주기도 하고 우아한 품위를 느끼게도 해준다.

나름의 독특한 개성을 갖게도 하는 것이 모자의 기능이자 효과다.

여자들이 언제부터 모자를 쓰기 시작했는지 궁금하지만 복식사 연구는 내 몫이 아니니 대신 그림 속에 남은 모자를 찾아 미술책을 뒤적여 봤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머리에 무언가 장식을 한 흔적이 남아있으나 역시 모자는 동서양 사람들이 남녀노소 두루 좋아한 듯싶다.





이미 14세기 때에도 모자를 쓴 사람이 양피지에 그려져 있고 프레스코화 템페라화에도 인물화라면 으레 모자를 쓰고 있다. 특히 외출 차림인 경우 맨머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모자를 쓰지 않았으면 하다못해 수건이나 베일이라도 드리워져 있다.

르누아르의 어여쁜 여인들은 꽃으로 화사하게 꾸민 모자를 썼고 루벤스의 그림 중 풍만한 여인이 깃털 장식 달린 검은 모자를 쓴 것도 있다.

여기서 모자는 빛 가리개 역할이 아닌 차림새를 가꿔 주는 어디까지나 장신구에 속한다.

그녀들에게 있어 모자는 예장의 마무리이자 정점이다. 그래서 패션은 모자로 완성된다고 했는가.





역시 모자는 얼굴 생김새며 윤곽이 또렷한 서구인에게 적격인 거 같다.

두리넓적하니 평면적인 동양인보다는 입체감이 도드라진 서양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모자.

오드리 헵번이나 잉그리드 버그만은 어떤 모자를 써도 근사했다.

근래 들어 모자가 아주 잘 받는 사람은 아마도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모자를 쓰면 한층 더 기품 돋보이고 전아해 보였으니까.





반면 동양 쪽은 모자와 그리 친숙하지가 않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머리 자체로 장식을 현란하게 꾸밀 뿐 달리 모자 문화가 발달하지는 못했다.

우리 역시 남자들은 사모니 갓을 쓰지만 여자들의 경우 혼례 시 써보는 족두리가 전부다.

고작해야 방한모인 남바위가 추가될까.

허리띠 졸라매며 모두가 어렵던 시절, 우리의 어머니들은 일을 할 때 수건을 썼다.

특히 밭을 맬 경우 정수리에 쏟아지는 땡볕을 막아 주는 구실을 하는 동시에 흐르는 땀을 닦아 내게도 한 수건.

하긴 서양에게도 화려한 모자를 쓰는 것은 일부 상류층이며 서민들은 검소하고 소박한 두건이 머리에 얹힌다.

명화 『우유 따르는 여인』이나 밀레의 그림에서는 우리처럼 흰 수건을 머리에 동여맨 차림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모자는 단순한 쓰개나 근사한 장식품의 차원을 지나 보다 특별한 의미가 담기기도 한다.

신체의 최상부인 머리는 하늘과 닿아 있는 까닭에 그만큼 소중히 대접받는 곳이다.

해서 신성하고 고귀한 왕위를 나타내는 왕관이 머리에 씌워지며 성년이 되면 치르는 관례(冠禮) 의식 또한
머리에 건(巾)을 씌우면서 시작된다.

왕관이나 건은 다 같이 모자이면서도 나름대로의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으며 나아가 직위나 신분의 간접 표현이 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모자는 햇빛과 깊은 상관관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적도 아래 태양이 강렬한 아프리카나 남방여인들은 모자 쓰는 일이 드물다.

이는 아프리카 풍물 사진이나 고갱의 그림들이 제대로 증명해 준다.

오히려 볕살만 보면 어디서든 일광욕을 하려 드는 서양 사람들이 모자는 더 즐겨 쓴다.

아무래도 모자에 관한 한 기존의 사전 풀이 외에 멋 내기와 시선 가리개가 첨가돼야 하지 않을까.



내게도 모자가 몇 개 있다. 그중 카키색 등산모는 십 년 훨씬 넘은 모자이지만 여전히 좋아한다.

하얀 면 소재에 남색 챙이 조붓하게 둘러선 또 하나의 모자는 사진발을 잘 받아 아끼는 것이다.

그 외에 회색 모자가 둘, 검정 모자와 여름용 흰 모자 등이 있다. 다 같이 챙이 너른 모자다.

내가 그 모자를 쓸 때는 빛 가림을 위해서 일 경우도 있고 사람들로부터 나를 감추고 싶은 기분이 들 적이다.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을 때도 그 모자를 푹 눌러쓴다. 집안에 문제가 있어 부부 싸움이라도 시끄럽게 했을 때
그냥 밖에 나가 이웃과 마주칠 용기란 없다.

누구와도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싶지 않을 적에도 아주 깊숙하게 모자를 눌러쓴다.

더러는 머리 손질할 여유 없이 급히 외출해야 할 경우, 모자는 정돈 안된 머리를 숨기는 방편도 된다.





유행에 민감한 부인도 아닌데 오십 대의 한 여인이 어느 날부터인가 모자를 애용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갑자기 이승을 뜬 뒤부터였다. 문상을 갔을 적에 그녀는 남세스러워 어찌 밖에 나갈꼬, 했다.

도저히 맨 낯으로는 태양 부끄럽고 세상 사람 창피해 나다닐 자신이 없다며 옹송그리던 그녀.

뭇시선들로부터, 소문들로부터, 관심과 호기심으로부터의 차단 역으로 그녀는 모자를 택한 것이다.





그랬다. 모자란 멋 내기뿐 아니라 내 존재를 가리고 싶을 때 최소한의 방벽은 되어 준다.

모슬렘 여인들이 차도르로 얼굴을 가리듯, 쓰개치마나 장옷으로 모습을 숨기듯,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쓰면 어느 정도는 나의 존재가 가려진다.

참 편하다. 아늑하기조차 하다.

멋쟁이만 모자를 쓰는 줄 알았는데 아하, 그래서 모자를 쓰는 여자가 그리 많았던가. -90-


사진 ㅡ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