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기고 미 주둔군이 최종 철수할 것을 트루먼이 승인한 것은 1949년 3월 23일. 이후 일 년간 삼팔선에서 열여덟 번, 남한 내에서 스물아홉 번의 게릴라전이 발생했다 그 해 5월 들어 북의 공격전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태풍전야의 고요였다. 일시적 소강상태 이후 그 해 6월 25일 휴일 새벽 느닷없이 북한은 전면 공격을 개시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서해안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순식간에 38선 전역에 걸쳐 북괴군은 무서운 기세로 밀고 내려왔다. 남한에 대해 전쟁 포고를 한 것은 한참 뒤인 오전 11시였다.
150만 명의 훈련된 무장병력에 9만의 전투병력, 150대의 소련제 탱크, 50여 대의 소련제 야크 전투기가 거침없이 서울로 향했다. 그때 남한 시민들은 휴일 아침의 느긋함을 즐기고 있었으며 서울 날씨는 흐린 채 약간의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오는 포 소리에 다들 혼비백산, 우왕좌왕하면서 대처도 제대로 못했다. 기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에 비교될 만큼 어마어마한 북의 병력에 비해 10만이 채 안 되는 병력에, 전투기는 아예 전무한 남한 측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일방적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전쟁이었다. 도대체 게임이 되질 않았다. 그처럼 속수무책, 밀리고 또 밀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7월 7일 유엔 안보리는 맥아더를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 16개국 1,938,330명의 전투 군인을 한국에 파견했다. 역사상 최초로 결성된 동맹군이 유엔의 깃발 아래 공산주의의 침략전쟁에 맞서고자 참전을 한 것. 이승만 대통령은 우리 힘으로 나라를 구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맥아더 장군에게 작전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걸핏하면 주권을 포기한 대통령이라는 비난을 하는데 당시 상황으로 북에 대적할 수가 있었던가? 7월 14일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은 유엔군 사령부로 이양되었다.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치를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 한국 사회에서 논쟁의 초점이 된 <전작권>의 발단은 이처럼 민족의 비극이자 불행인 6.25로 인해 생겨났다.
공산주의 방식에 의한 남한 점령을 오매불망 꿈꿔온 자, 공산국가로의 통일을 위한 수단으로 스탈린 모택동을 후원자 삼아 전쟁의 불을 댕긴 자가 김일성이다. 치밀한 사상교육까지 받은 훈련된 군대는 남침 개시 다음날 서울에 입성하였다. 해방 이후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선 남한은 좌우 이념이 수시로 충돌해 댔다. 그처럼 내부 갈등의 홍역을 치르느라 제대로 체계 갖춘 병력이 있을 리 만무였다. 자유의 이름으로, 민주의 이름으로, 중구난방 너도나도 나서던 세월이기는 요새와 흡사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침략군에 맞서 대항하기는커녕 손써볼 겨를도 없이 고스란히 밀릴 수밖에.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에게 대전이 떨어지고 이어서 대구를 내주었다. 그들은 빠르게 남쪽으로 진격해 왔다. 남한의 90%를 점령한 채 낙동강 전선 건너 48킬로미터 떨어진 임시수도 부산 함락을 목전에 둔 그들은 어느 때보다 치열한 총공세를 펼쳤다. 남한의 공산화는 시간문제였다. 아군으로서는 죽을 각오로 지켜야 할 마지막 방어선이었다. 풍전등화와 같은 국가의 명운. 그처럼 국가의 존망이 걸려있던 낙동강 전투의 와중,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며 전세는 역전되었다. 세계 전사에 기록될 승리전으로 백척간두의 명운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킨 한국군과 유엔군은 침략군을 몰아내고 석 달 동안 인공 치하에서 떤 서울을 탈환했다. 그 해 9월 28일의 일이었다.
<우리 민족 서로 돕기 운동>의 상임대표 자격으로 북을 수차례 드나든 월주 스님은 근자 미사일 사태를 계기로 북에 대한 우호적 시각을 거두게 됐다고 토로했다. 그는 인도주의 정신에 입각한 민생지원으로, 경제난에 허덕이는 북한이 얼마쯤 변하리라 기대했다. 그리하여 한반도의 긴장이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으나 상황이 호전되기는커녕 핵과 미사일로 중무장 완성을 한 북한. 그에 따라 한반도의 긴장 고조는 물론 국제사회까지도 잔뜩 긴장시키는 북의 작태에 실망했다는 월주 스님.
햇볕 정책의 옹호자로 백두산에서 감격의 통일 시까지 읊으며 눈물지었던 고은 시인도 급진에서 슬그머니 선회했다. 통일문제는 성급하게 다룰 사안이 아니라 서서히 자연스럽게 기운이 무르익어야 된다며 그는 100년 통일론을 피력했다. 뒤늦게 그들은 북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한 것이다. 결코 햇볕에 녹을 체제도 사상도 아닌 북한이요, 한반도의 평화는 경제 지원 등 돈으로 살 수도 없다는 걸 한참 감싸 안고 퍼 나르고 나서야 안 셈이다. 반면 여전히 어리석은 꿈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