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사무직의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데 일터에서 거의 정장을 한다. 스스로를 위해서다. 정장은 자세를 바로세워주며 어느 정도 긴장시킨다. 따라서 차림이 반듯하고 단정하면 헐겁거나 풀어진 틈새가 보이지 않게 된다. 군경의 제복이 단적으로 입증하는 바와 같다. 이처럼 자신을 위한 면도 있지만 깔끔한 옷차림은 상대방에 대한 예의이며 이미지 관리를 고려해서이기도 하다. 이민 초기에 꽃집을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 이후부터다. 세탁소를 운영하며 정장 차림이라니? 직접 기계를 돌리는 세탁공장이 아니라 드롭샵을 하므로 작업복일 필요는 없었다. 단순히 빨랫감을 받아 공장에 넘기기 앞서 각기 텍을 달아 분류만 정확히 하면 되니까. 고로 꼭 일복이 아니어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정장을 고수함은 행여라도 콧대 높은 백인들에게 몰캉하니 얕잡힐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일종의 오기 혹은 자존감일지도 모르겠다. 가뜩이나 자그마한 동양인이니 왜소하기도 하려니와 나이까지 들어 추레하게 보일 필요는 없으므로 그 다짐의 실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실용주의자들인 미국인들. 형식에 과히 신경 쓰지 않는 그들인지라 청바지 티셔츠에 맨얼굴이 예사롭다. 격식이나 체면치레에 별로 얽매이지 않는다. 그들 시각에 일터에서의 정장은 의아하다. 치렁치렁한 드레스 차림도 아닌데 이브닝 파티가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특별한 날이냐고도 한다. 비아냥이 아니다. 그들은 통상 예를 갖춰야 할 경우에나 정장을 입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니 그냥 평상복인 거야. 내 대답은 간단명료하다. 그 정도로 이 사람들 정장 차림은 결혼식이거나 장례식 때의 예복 차림. 그 외에는 변호사나 은행원이 직업의 특수성상 정장을 한다. 일반적으로 대개는 면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재킷을 걸친다. 그나마 동부에는 화이트칼라가 많은 편이라 드레스 셔츠 차림이 흔해 이곳 한인들이 종사하는 주업종이 세탁업. 뉴저지에만도 공장 드롭샵 합해서 7천여 군데라고 하며 나도 그 숫자에 포함된다.
어느 식당에서 음악을 가지고 한 가지 실험을 하였다고 한다. 매상과의 상관관계에서 단연 효과적인 음악은 클래식. 실내에 클래식이 흐르면 손님은 스스로를 품위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된다는 것. 자신이 문화적이고 교양 있는 것 같이 여겨져 더 비싼 음식에 고급 와인을 주문하게 되더라는 것. 감성 마케팅 시대인 현대다. 그래서 한스 우베 킬러라는 독일의 경영 컨설턴트는 고객을 대할 때 왕이 아닌 연인대하듯 하라고 이른다. 왕좌라는 권위로 군림하는 대상은 꺼려지는 반면 연인은 무한정 마음 다한 성심을 쏟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느 누군들 연인과의 만남에 편하다는 이유로 허술한 옷차림을 할 수 있을까.
옷차림은 때와 장소에 적합해야 한다. 일을 하면서 작업복이나 간편복이 아닌 정장 차림은 기실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만큼 불편하거나 거추장스러운 것은 아닌데 통상 인식, 즉 굳어버린 고정관념상 정장은 일옷이 아니라고 여긴다. 물론 도포자락 늘어뜨린 어부나 비단 마고자 입은 나무꾼이란 한갓 희화 거리. 그럼에도 줄창 정장을 고수하다 보니 이제 사람들 눈에 익숙해졌다. 평상복일 수도 있는 정장, 이미 그건 사치스러운 옷치레나 허황된 겉멋이 아니다. 센스 있는 멋쟁이가 못되다 보니 오히려 요모조모 따지지 않고 쉽게 걸칠 수 있는 옷이 정장이 아닌가 싶다.
우리 속담에 입성이 날개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가난한 집안의 서생일지라도 과거 보러 갈 적에는 두루마기에 갓 쓰고 선비의 기본을 갖춘다. 귀양살이하다가도 왕명을 받들려면 의관 정제부터 한다. 빈 방앗공이질을 해야 할 만큼 구차한 살림을 산 백결선생은 누더기 진 옷을 겹겹이 꿰매 입어 얻은 이름. 술에 찌든 파락호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평상시 의관만은 반듯하게 갖추고자 한다. 그래서인가, 사람살이의 기본 요소인 의식주에서 가장 중요할 법한 먹거리보다도 먼저 등장하는 것이 옷이다. 빛 좋은 개살구처럼 내실 없이 겉치레나 그럴싸하게 하자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품격은 스스로가 만든다. 물론 번지르르한 옷차림만으로 격이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억지춘향으로 꾸미라는 게 아니라 이왕이면 다홍치마다. 있는 옷 잘 맞춰 단정하게 입으면 정장, 그건 옷사치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애정이기도 하다. 때로는 입는 옷이 그의 인품을 반영한다.
또 한 가지, 사당이나 현충원을 참배하며 울긋불긋한 복장을 한다면 무례를 넘어 몰상식으로 간주된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락 가수일지라도 긴 머리는 묶고 차림새 때와 장소에 맞춰준다. 밤무대와 일반공간은 상식선에서 이성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베르사유 궁전이든 자금성이든 출입에 옷차림이 구애받지 않는 반면 바티칸 방문 시 비신자인 일반 관광객에게도 요구되는 예절이 있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며 베드로 성당의 피에타 상을 직접 만나고자 한다면 민소매 차림이나 짧은 반바지로는 곤란하다. 의관 정제까지는 아니라도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기 전에는 입장 불가라고 못을 박아두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일날 주님을 모시고자 성전에 나오는 우리의 자세는?
대상을 떠올리면 언뜻 연상되는 이미지, 곧 저마다 ‘상징’하는 것이 있다. 통상 성당을 상징하는 것은 장중하고 엄숙한 전례 의식이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祭儀이자 공적으로 모여 기도하는 자리인 미사에 참례할 때는 내적인 준비를 하고 경건한 자세로 임하는 것이 신자 된 의무이다. 살아 현존하는 주님을 만나는 시간인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에 가기 전 거울 앞에서 자신을 가다듬게 된다. 무속에서 치성 드리기 앞서 찬물에 목욕재계하듯, 적어도 매무새부터 단정하고 점잖은 차림으로 다듬는 것이다. 물론 외형만 깨끗하게 차리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 생활 속에서 신앙을 증거하고 하느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리라.
얼마 전 신문에서 본 기사가 생각난다. 백악관에 초대되어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여대생 몇 명의 사진이 실렸는데 얼굴이 아니라 정확히는 발만 클로즈업되어 있었다. 가느다란 끈이 달린 샌들을 신은 그들의 맨발이 가십 대상이었던 것이다. 대통령과 만나는 자리의 차림새로는 기본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꼬집은 그 기사는 한마디로 부적절한 복장 예절에 대한 문제 제기였다. 아무리 개인의 자유가 넘쳐나는 민주국가 미국일지라도 그럴진대 하물며 성전에 서랴. 각자 외출하기 앞서 자신의 옷차림을 한 번씩 돌아볼 일이다. -2008 미주중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