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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1. 2024

왜관 흔적 고스란히 초량 골목에

부산 구석구석

부산역 근 고관에서 한 블록 뒤편 복개도로를 낀 너른 골목.

덩굴진 홍장미 곱게 핀 경남여중을 지나 수정 1동 행정센터 옆에 그 집은 있었다.

일본식 전통 목조 2층 건물로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고급 주택인데 등록문화재 330호다.

일본인 사업가 다마다 미노루가 지은 개인 가옥으로 초대 철도청장의 관사로 쓰였다고 한다.

광복 후 적산가옥을 개인이 불하받아 용도변경해서 요정으로 사용된 정란각 건물.

도로 안내판을 따라 정란각에 들어서니 역시 석등이 선 일본식 정원이 마중해 준다.

너른 잎 팔손이나무 그늘 아래 아담스러운 앵두나무엔 빨간 앵두가 말간 얼굴을 하고 내다본다.

보리수꽃이 한창인 철인데 흰 점백이 보리수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적산가옥에는 흔히 단풍나무 사철나무 향나무 남천과 함께 보리수나무 무화과나무가 있었더랬는데...

불현듯 신작로 건넛집인 승원이네 마당이 떠올랐다.

어릴 적 친구인 승원이네 집은 초가인 우리 집과 달리 회벽에 함석지붕을 인 적산가옥이었다.

뜰에는 여러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애들이야 정원수 이름은 관심도 없지만 오동통한 보리수 열매가 익기만을 기다리며 나무를 올려다봤다

불그레 익은 보리수 열매는 과즙 달큰하고 새콤한 맛으로 동네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뽀루수라 부르던 그 열매는 씨 야문 앵두와 달리 씨까지 씹어먹는데 조랑조랑 열기도 무지 열렸다.

큰 키의 승원이 언니는 나뭇가지 휘어잡고는 뽀루수를 한 바가지 따서 우물물에 두어 번 씻어서 줬다.

뽀루수 철이 지나면 무화과가 익었는데 맛도 들들하고 과육이 퍼석해서 별로 좋아하진 않았다.

침침한 마루보다는 마당에서 주로 땅따먹기 놀이를 하던 양갈래 머리 쫑쫑 딴 두 아이.

늘 어둑신하던 진고동색 좁고 긴 복도 끝에는 이층으로 오르던 계단이 있었다.

방마다 다다미가 깔려있었으며 오시레라 불리던 벽장은 넓고도 길줌했다.

거기서 우린 미닫이 나무 문을 꼭 닫아걸고는 저물도록 소꿉질하며 놀았다.

바로 이웃에 있는 금융조합 서기였다는 승원이 아버지는 당시 군내에 하나뿐인 대서소를 운영했다.

키가 후리후리하고 허리가 늘씬하던 승원이 엄마는 주사로 코끝이 빨개진 남편을 영 못마땅히 여겼다.



일본이 조선 침략의 교두보로 삼았던 부산이라 일본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있는바
특히 일인들이 밀집해 살았던 고관 주변에는 일본 가옥이 다수 눈에 띈다.

편협한 사람들은 왜색 문화를 찾아다니며 즐긴다고 나무라나, 근세사를 몽땅 뭉개버린다고 일제강점기 치욕의 역사가 지워지는 건 아니다.

知彼知己 면 百戰不殆라, 오히려 제대로 알고 대처해 나가는 게 훨씬 낫다.

무작정 쇄국보다는 해금, 열린 시각으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면은 버리면 그만이다.

왜색이라면 무턱대고 뜯어 없애기보다 일제 강점기 주택 양식과 생활상 연구에 좋은 연구 자료로 삼으면 된다.

조선총독부 건물이었던 중앙청사를 부숴버린 우거에 비하면 이는 잘하는 일이다.

오욕과 질곡의 과거사가 건물 하나 없앤다고 굴욕적인 식민지 역사 영영 사라진다면 모르나 그렇지 않다

국가적 자존심이니 국민감정이니 들먹이며 중앙청사를 민족정기 회복 또는 역사 바로 세우기란 미명하에 날려버렸지만

오히려 뼈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국민 각성의 상징물로 삼는 것이 교육적 효과가 크지 않았을까.

오죽 일본이 싫으면 하룻만에 여행 다녀올 수 있는 나라를 칠십 넘어서야 겨우 한번 밟아봤으랴.

죽창가를 불러서 일본을 이길 수 있다면 목이 터져라 부르겠지만 철딱서니 없이 한심한 짓,

반도체 기술로 일본을 넘어서서 내실 갖춘 경제력으로 부국강병 이루는 것만이 우리가 승리하는 길이다.  

히로히또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선언을 하므로 광복을 맞으면서 일본거리였던 초량은 환골탈태를 하게 된다.

비록 우리 힘으로 쟁취한 광복은 아니었지만 그 덕에 되찾게 된 고관 거리에 위치한 적산가옥들.

요정 정란각으로 알려진 적산가옥은 현재 문화유산국민신탁이 위탁받아 문화사랑방으로 꾸며놨다.

문화공감 수정이란 새 간판을 내걸고 찻집을 운영하는데 동구노인종합복지관이 이를 맡았다.

문화재 카페에서는 색조 고운 대추차가 어울릴까, 향 은은히 풍기는 모과차가 제격일까.

그나저나 문화유산국민신탁은 대체 뭔고?

 요새는 새롭게 만들어진 기관이나 단체가 하도 많아 첨 듣는다 싶던 대로 2007년 문화유산 보존을 국민이 힘 모아 해 나가자는 취지의 시민 사회운동을 벌여 맺은 결실이란다.

  국민들이 십시일반 내놓은 기금을 모아 보전가치는 있으나 관리가 버거워 방치됐던 문화유산을 특수법인체인 국민 신탁이 도맡아 관리하며 지자체 단체에다 운영은 위탁한다.

소유는 문화재청, 따라서 국고에서 문화재 보수비용 등을 일부 지원받고 있다고.

 정란각 건물 외형은 전형적 일본 가옥이나 오래 한국에 뿌리내려서일까, 전체 분위기나 공기는 그리 낯설지 않았다.

이어서 스타일부터 진짜 일본다운, 왜색향 짙게 밴 실내로 들어가 본다.


무심히 역사를 담은 집, 정란각.

일본 무사계급의 전형적인 주거형태로 옛 건축양식에 따라 지은 집이다.

에도시대 사무라이는 성(姓)을 사용할 수 있는 특권층, 떵떵거리는 지배계급이었다.

전통을 그대로 살려 문창살 하나까지 실내외 어디라 할 거 없이 꼼꼼스레 정교하게도 다듬었다.

해방이 되며 왜인들이 살던 집은 적산가옥이란 이름으로 개인에게 불하되어 이 집은 요정이 된다.

가난에 쩔어살던 이때야말로 낯 부끄럽게도 일본인들이 한국에 기생관광을 오던 시절이다.

사철 온천수 따스하고 경관 좋은 부산에 대한 일본인들의 아련한 추억의 현을 자극하는 그곳 정란각.

해안가 차지하고 온갖 유세 떨며 부를 누리던 고관시절의 향수가 깃든 바로 그 중심지에 있는 일본가옥의 기생집이다.

왜인들이 모여 살던 옛 고관땅에서 조선 기생을 품고 놀 수 있는 관광이라, 일본 남정네들 입맛 땡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서 생겨난 것이 일본인 현지처, 이게 일본이 세계경제를 쥘락펼락하던 시절 바로 우리들의 또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로 뒤엎은 나라 인정할 수 없다며 미국의 케네디는 전후 계속 쏟아붓던 무상원조를 단칼에 끊어버린다.

종이며 밀가루 강냉이뿐인가, 외국에서 원자재 사 오려면 꼭 필요한 외화는 싹 자취를 감춰 구경도 할 수 없다.

이미 일본은 과거사 문제와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한국과 껄끄러운 상태였다.

고민 끝에 대통령이 같은 분단국인 독일로 가서 어려운 사정 눈물로 읍소한 끝에 산업차관을 얻어오게 된다.

담보물 대신 광부와 간호사를 보내달라는 조건에 따라 숱한 젊은이들이 지하 갱도에 들어가 석탄 캐고 시신 닦았다.

이때 통역을 맡은 이는 이승만대통령 시절 국비유학생으로 서독에 가 경제학박사를 취득하고 온 분이었다.

정란각에서 왜 퍼뜩 그 생각이 났을까.

경제력이 곧 국력, 힘이 없으면 별 수 없다. 그러므로 반일이 아니라 극일만이 답이다.

과거를 잊은 자 그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게 된다 하였다.

아픈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정란각은 이제 문화공감 수정이란 이름으로 전통차와 수제 쿠키를 내놓는 찻집으로 변신했다.

문화재청에서 매입해 깔끔하게 꾸며놓고 지금은 동구 노인복지관 어르신들이 건물과 찻집을 직접 관리 운영하고 있다.

목조주택이 주는 안온함과 한지 창의 정갈한 분위기 덕인가, 일본집이란 선입견을 지우고 예전 내 집처럼 편안하게 안겨든다.

차 한잔 앞에 두고 친구와 담소 나누며 창호 사이로 환하게 들어오는 햇살 고즈넉이 즐기기 좋은 오월이다.


부산광역시 동구 수정 1동 홍곡로 75, 이곳 주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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