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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9. 2024

책이 탑을 이뤘던 골목

부산 구석구석

부산은 역사의 격변기마다 크게 요동질을 쳐야 했네.  

광복의 기쁨도 잠시였다네.  

왜인들이 황급히 부산항을 빠져나간 뒤로도 아직 사회 전반은 혼미스럽기만 했다네.

대한민국 정부가 안정되이 자리 잡기도 전, 북의 도발로 민족의 비극인 육이오 전쟁이 터졌네.   

서울을 뒤로한 정부의 모든 기관이 부산으로 몰리면서 졸지에 중앙정부의 임시수도가 된 부산이라네.

전국의 피난민까지 꾸역꾸역 밀어닥친 부산은 전쟁 전에 비해 인구가 두 배로 대폭 늘고 말았네.

피난민들은 당장 비바람 피할 거처로 판자 떼기와 미군부대에서 나온 박스를 얼기설기 엮어서 겨우 집으로 삼아야 했다네.

하루하루 입에 풀칠하려면 역에서 지게꾼 품을 팔거나 하역 노동자로 또는 노점 장사로 겨우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네.

당시 부민동에 있던 경남 도지사 관사는 서울 낙산 이화장에서 내려온 이승만 대통령의 임시 관저가 되었더라네.

행정수도 버리고 피해 온 지도자이건만 그래도 미더운 그늘이라고 병아리새끼처럼 옹기종기 부민동 인근으로 모든 기관이 집결됐다네.

서울에서 피난 온 각 대학들은 구덕산이나 보수동 뒷산에 천막 치고 임시 학교를 열었으니, 부민동 보수동 국제시장은 피난 수도의 중심지가 되었네.

따라서 보수동 샛골목은 날마다 아침저녁이면 학생들과 교사들로 복작거리는 번다한 길목이 되었다네.

이에 착안, 맨 처음 보수동 초입에 책 노점상을 편 사람은 평양에서 피난 온 청년으로 미군부대 개구멍으로 흘러나온 헌 잡지책을 모아서 팔았다네.

그럭저럭 제법 장사가 되자 고물상 리어카가 모아 온 중고책을 파는 비슷한 가게들이 죽 들어서면서 보수동 책방 골목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네.

가난한 대학생들의 책을 맡아주고 전당포처럼 돈을 내주던 시절도 있었다는데 반면 그곳에 가면 헌책이나 재고 책을 싸게 살 수가 있었다네.

얼마 전 서울로 이사를 간 친구가 짐 정리하면서 가장 골치 아픈 게 한 질의 브리테니커 사전이며 대하소설 등 빽빽한 장서 처리였다고 하데.

도서관에 문의전화를 하니 책을 실어다 주면 받는다 하고 고물상에 연락하자 신문지보다 값을 낮게 쳐주는 게 책이라 별로 내키지 않아 하더라네.

그냥 가져가래도 달가워하지 않아 사정하다시피 부탁해서 봉고트럭 한가득 싣고 가는데 고마워서 수고비까지 얹어주었다 하네.

주택에서 살다가 아파트로 살림 옮기려면 첫째 애물단지가 항아리들이고 두 번째가 서가 가득 찬 책이라는 말에 끄덕끄덕 수긍이 간다네.

그런 세상에 아직도 헌책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유명하던 청계천 헌책방들도 상가 개발 이후 사라진 지 오래인데 보수동 책방 골목만은 고서 전시회 등 문화행사를 유치하면서 책 박물관 역할하네.

책방 골목이 한창 인기를 누릴 때는 70여 가게가 번창했으나 호황기가 지난 이즈음은 겨우 30여 점포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네.

왜 아니 그러하겠나, 모든 물자가 귀했던 시절에는 교과서나 참고서도 대부분 헌책을 사서 썼으며 사전이나 잡지류도 헌 책 불티나게 팔렸더라네.

80년대 말, 라테만 해도 말야 여긴 자주 갔었다네.


두 애들 데리고 헌 책을 사러 보수동 드나든 기억이 남아있는 내게야 젊은 시절을 회상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한 보수동 책방 골목.

일반 서점의 정가 책 보다 월등 낮은 가격으로 책을 살 수가 있어 작은 아이는 전과를, 큰애는 성문 종합영어나 수학의 정석을 골라 들었던 그곳.

누군가가 문제집을 사용한 다음 내다 팔았으니 거개가 먼저 쓴 사람이 연필로 풀어놓은 답을 지우개로 싹싹 지워내야 했었다네.

특별한 고서, 희귀본, 외국 원서, 전문서적이 유통되기도 하지만 보수동 책방 거리는 학기 초만 되면 참고서 사려는 학생들로 늘 성시를 이뤘더라네.

요즘에야 학원이 있어 구태여 자습서니 문제지를 따로 구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인터넷 세대들이야 냄새 쿰쿰하게 나는 헌책 거들떠나 보겠는가.

문화거리로 지칭되며 부산의 또 하나 명소로 떠오른 지금은 책을 구입하려는 사람보다 관광객들이 더 많이 찾는다는 보수동 책방 골목이라네.

요즘에사 독서의 계절이 따로 있겠나.


탑처럼 쌓인 서책의 묵은 이끼 내음 사이에서 괜찮은 책 한 권 뽑아 들고 사색의 길로 잠시 떠나봄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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