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석굴의 진수

by 무량화


중국땅에는 자랑스러운 3대 석굴이 있다.

돈황 막고굴(敦煌莫高窟), 뤄양 용문석굴(龍門石窟), 다퉁 윈강석굴(雲岡石窟)이 그것이다.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막고굴과 하남성 낙양의 용문석굴 그리고 산서성(山西省) 대동(大同)의 운강석굴, 이라고 해야 퍼뜩 알아듣겠다만.

세 곳 다 독특한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각각 풍부한 벽화와 조각을 품어 안고 초기 석굴 예술의 진수를 보여준다.

굳이 일러 무삼하리오,인 감숙성(甘肅省) 돈황(敦煌)의 막고굴(莫高窟)은 캘리 게티센터에서 열린 특별전을 통해 그 위용을 접한 바 있다.

석굴 일부를 실물 원형 그대로 재현시키다니 과연 게티 재단이 운영하는 막강한 게티센터다웠다.

산서성에 있는 대동 운강석굴은 중국 내에서도 가장 거대한 석상, 직접 본 바는 없어도 매우 낯익은 편이다.

북경과 가까운 위치라 하나 단지 과거 유물에 불과한 구경거리 대불상, 위용에 비해 어쩐지 짠한 느낌도 든다.

반면 호기심 하냥 부풀게 한 용문석굴.

허난성(河南省) 뤄양, 하남성 낙양이 어떤 장소인가.

고대 군벌들의 패권싸움이 그치지 않았던 땅이고 새 왕조가 일어났다가 스러지기를 거듭한 고도다.

시안이 3천 년의 중국역사가 서려있는 곳이라면 장안은 무려 5천 년의 역사가 스며든 곳, 해서 사마광은 "고금의 흥망성세를 알고자 한다면 낙양성에 한번 가보라" 권했다.

낙양이 속해있는 하남성은 중원지방이다.

중원지방은 황하문명의 발원지로 토지가 비옥하고 광대하다.

당시 황하와 그 지류 유역은 중국에서 가장 농업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기에 중심거점인 수도로 적합했다.

따라서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상나라를 비롯,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나라까지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중국의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삼국지, 위(유비)·촉(조조)·오(손권) 삼국이 천하를 놓고 다투는 혼란의 시대, 후한의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장안(시안)으로 천도한다.

그러나 대혼란기의 와중 위나라가 서자 다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기게 된다.

아무튼 그 장안과 낙양을 골고루 들린다니 어찌 아니 혹할쏜가.

패키지여행을 전혀 선호하지 않으나 이번 여행은 병마용과 더불어 하남성 용문석굴이 포함돼 있기에 주저치 않고 택한 여정이다.

그것도 가슴 설레는 기대감으로 잔뜩 부푼 채.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는 494년 하남성 낙양(河南省 洛陽)으로 천도를 하였다.

이날은 낙양에서 남쪽으로 13킬로 떨어진 용문석굴 탐방길에 나섰다.

용문산과 향산 사이 이강(伊水)을 끼고 있는 그 오른쪽 석회암벽 동편과 서편에 대굴(大窟) 28동, 석감(石龕) 785개, 소굴(小窟)까지 합치면 2천여 개소에 불상조각이 새겨져 있는 동굴사원이다.

북위(北魏)에서 수(隋)·당(唐) 및 송대(宋代)에 걸쳐 꾸준히 조성을 이어왔다니, 물경 6세기 초에서 7세기 중엽에 이르는 장구한 세월이다.

여러 차례 왕조가 바뀌는 동안 저 무수한 굴속의 조각상에 기원을 새기는 민중들의 사연을, 황톳물 유장히 흐르는 저 이강만이 변함없이 지켜보았을 터.

이날도 가을비 하염없이 내렸다.

그럭저럭 어느 정도 이력이 붙어 웬만한 빗줄기쯤 무시하고 층계 조심조심 오르내리며 석굴을 눈에 담았다.

거무틔틔한 석벽은 비에 젖어 더 검으레했다.

반들거리는 포도의 석회암을 발끝으로 차보니 무척 단단하기만 한데, 정작 경도는 2~3 정도로 부드러운 암석이라 암벽 조각이 그리 용이했던가.

하긴 대리석보다도 더 연한 암석이 석회암이라니 섬세한 미소와 엷은 옷자락 표현이 한결 자재로웠겠다.

그래도 바위산 전체에다 벌집마냥 굴을 뚫고 불상을 안치시킨 의도의 저변은 아무래도 혼미한 세태의 반증?

군웅이 할거하는 어지러운 세상이라서 태평성세 염원하며 절벽에 매달려 순전히 끌과 정만으로 바윗돌 다듬었을 석공들.

중국 석굴의 백미(白眉)로서 평가받고 있는 높이 17m의 비로자나불은 가장 큰 불상으로 당(唐) 고종 때 조성되었는데, 중국 유일의 여황제였던 측천무후의 용모와 닮았다고 가이드는 설명한다.

하긴 이 대불이 만들어진 675년은 무후가 고종의 총애를 받던 황후일 때였으니 그럴싸한 가설이긴 하다.

얼핏 보면 석굴암 부처님의 자비로운 풍모가 겹치나 도도한 위엄에서 최고권력에 대한 욕망이 엿보인다는데.

그렇다면 대불상의 측천무후 얼굴 설은 가당치도 않은 불경이자 신성모독이다.

태양이라는 뜻의 비로자나불은 햇빛처럼 불보살의 지혜가 온 세상에 두루 비춰 일체중생을 제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부처님이 비로자나불이시다.



하긴 쏜살같이 내닫는 세월앞에 무상치 않은 게 어디 있으랴.

암석 그 견고한 덩어리라도 저절로 풍화되어 삭아 내리거나 밀림 속에 파뭍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앙코르와트 타프롬의 뭇 사원과 무희들이 그러하듯이.

열대우림 거목 뿌리에 휘감겨 이제는 옴싹달싹도 할 수 없는, 심지어 나무 제거 시 사탑이며 사원이 붕괴될 터라 보수 공사조차 어려운 실정인 타프롬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참 전 절강성 항주에 있는 대찰 영은사(靈隱寺)에 갔을 때다.

규모 엄청난 절보다도 인근 비래봉(飛來峯)에 있는 동굴 석주에 정교하게 조각된 불상들에 놀란 적이 있다.

감탄사가 아니라 탄식이 터져 나온 이유는 불상들이 마구잡이로 훼손된 상태라서였다.

문혁 당시 홍위병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일부는 영은사를 때려 부술 심산으로 몰려왔으나 등소평의 기지로 모택동의 대형 초상화를 절 앞에 걸어 피해를 모면했다는 얘길 들었다.

용문석굴 또한 상당히 훼손되어 있었다.

원형이 온전히 보전된 석상은 별로 없고 그나마 약간씩 조각나고 깨어진 상태라면 안타까움이 덜하련만 아예 통재로 들어낸 석불이 많아 대체로 빈 석굴 투성이었다.

게다가 시커먼 페인트가 흩뿌려진 석벽의 자국은 회교도들이 휩쓸고 지나간 흔적이라고 했으나 글쎄?

상당 부분은 문혁 초기 홍위병에 의하여 훼손되었다는 게 정설이지 싶다.

그밖에 불두(佛頭)를 소장하면 복이 들어온다는 민간의 속신 때문이기도 하고, 근세 들어 도굴단이 창궐하며 일본과 유럽의 호사가들 소장품으로 넘어간 불상도 많다고.

그 가운데 일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과 칸자스시 아트킨스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외국 대형 박물관을 구경 다니다 보면 그리스 로마 이집트 인도 중국 동남아시아 제국들의 문화재가 아예 기둥채 뽑혀와 전시된 경우도 흔했다.

동시에 한국의 유물들도 종종 눈에 띄나 어쩌겠는가, 강화도 외규장각 의궤처럼 내 힘이 약하면 언제라도 먹히고 마는 게 국제사회의 역학구조 아닌가.


이강 건너편 향산으로 향했으나 세차게 쏟아지는 비로 인해 향산 중턱까지 올라가기 상그러웠다.

결국 향산사와 백거이 묘소가 있는 '백 원'은 정원이 너무도 훌륭하다는데 아쉽지만 그대로 패스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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