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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조주의보 발효 중

by 무량화


앙코르와트에 갔었다. 뉴욕에서 한국을 다녀오는 왕복 항공권이 제공하는 서비스 중에 괜찮은 게 있다. 약간의 추가 비용으로 하와이나 동남아 한 곳을 선택해 여행할 수 있는 꿀팁이다. 하와이도 구미 당기지만 아무래도 커다란 여행 가방이 부담스럽다. 해서 한국으로 직행, 볼 일부터 본 다음 가벼이 동남아로 날아간다. 그렇게 곁들이로 중국을 갔었고 캄보디아도 다녀왔다. 앙코르 유적 중의 타프롬에서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아울러 기묘한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특히 그곳에는 울만한 별도의 공간이 있었다. 소리가 밖으로 전혀 새어나가지 않는 비밀의 방, 이름하여 통곡의 방이다. 슬픔을 토해내며 마음 놓고 울음 울 수 있는 장소다. 때로는 홀로 거기 들어앉아 있고 싶다. 맘껏 소리쳐 울어보거나 가슴 치며 한을 토해내고 나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다. 그런 장소가 가까이 하나쯤 있으면 좋겠다. 누군가에게 하소 할 수 있는 슬픔은 이미 설움이 아닐지도 모른다. 더러는 그조차 못하는 한덩이 아픔을 우리는 속내에 묻고 살기도 하니까.



캄보디아 열대 밀림 폐허 속의 검은 사암 건물 중 하나다. 크메르 왕국이 최전성기를 이룬 당시, 자야바르만 7세가 자신의 어머니를 기리고자 봉헌하였다는 사원 안이다. 건축 노역에 끌려온 민초들이 일에 지친 채 고향 그리며 울음 울던 곳인가. 몹쓸 병고에 시달리던 왕이었다니, 아들의 처지를 슬퍼하며 눈 짓무른 그 어머니를 위한 방이었던가. 아니면 왕도 때로는 울고 싶을 적이 있어 찾아오던 곳인가. 스펑나무 이엥나무 열대 거목 뿌리에 휘감긴 타프롬 사원에는 울만한 자리가 은밀하니 마련되어 있다. 가끔 이끼 푸른 그곳이 생각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이란 영화의 한 장면을 몇 번인가 되돌려 본 적이 있다. 상처받아 피폐해진 영혼인 주인공. 날카로이 각진 그녀는 세상과 화해하지 못하고 여러 번 자살시도를 한다. 다시 병실에 실려온 그녀에게 정신과 의사인 외삼촌은 말한다. "유정아, 네가 좀 울었으면 좋겠구나". 그처럼 아픔을 토해내고 상처를 씻어줄 눈물, 또는 벅찬 감동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이 때로는 얼마나 절실한지. 뭉클하면서 눈가가 맵싸해지다가 종내는 주르륵 흘러넘치는 눈물에 흥건히 젖어보고 싶다. 강둑이여, 터지거라. 마구 터져 한바탕 쏟아져 내리거라. 눈물 한번 맘껏 흘려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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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쯤은 청하고 싶은 눈물이다. 울컥 솟는 잠시의 뜨거움 말고 소낙비 내리듯 철철 눈물을 흘려보고 싶다. 가슴속 맺힌 응어리 죄다 쏟아내 가며 실컷 눈물을 흘려보고 싶다. 어깨 들썩이며 하염없이 한참을 울어보고 싶다. 물기 어린 언어라는 눈물, 마음에서 곧장 흘러나온다는 눈물이다. 하긴 살면서 울 일이 별로 없다는 건 일상의 안녕을 뜻하니 분명 감사할 대목이다. 그러나 애통지심에 겨워야만 눈물을 흘리는 게 아니잖는가. 기뻐도 줄줄, 기도를 하다가도 펑펑 눈물이 터진다. 뜻밖의 감격 앞에 주체 못 하게 쏟아지기도 하는 눈물. 그렇듯 눈물은 감정의 정화제이자 유연제이기도 한 것을.




독한 가뭄이 들어 심하게 타들어가는 논밭 꼴이다. 마음밭이 점점 삭막해지고 황량하게 메말라감을 느낀다. 매사 무감각해지며 맹송맹송 건조해져 사막화되어 가고 석화되어 가는 심전에 물기를 적셔주고 싶다. 언제부터였을까, 감성이 무뎌지다 못해 이리도 팍팍해진 것은. 녹록잖은 이민살이 긴장하고 경계하며 바짝 나사를 조여왔던가. 해갈을 면하려면 좀 헐거워지고 만만해져야 나아질까. 하긴 어릴 적부터 울보와는 거리가 멀었다. 살면서 눈물이 북받칠 것 같은 상황에 처해도 조금 괴다만 말뿐 이내 무덤덤히 사그라들고 마는 물꼬. 사실, 나잇살이나 들어 주책없이 내비치는 눈물은 청승맞기도 할 테지만.



눈물에는 기본적 눈물과 반사적 눈물이 있다고 한다. 일정량이 온종일 지속적으로 나와 눈을 부드럽게 해 주고 살균작용도 하는 게 기본적인 눈물이다. 다른 하나는 크게 감동을 받거나 아플 때 혹은 슬픈 일을 당해 반사적으로 터져나오는 눈물이다. 얼마 전부터 그 기본마저 역할이 부실해져 급한 대로 인공누액을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부족한 눈물을 인위적으로 보충해 주지 않으면 눈이 심히 불편해서다. 마음에만 건조주의보가 내린 게 아니라 설상가상 안구건조증까지 겹쳐 곤욕을 치른다. 결국 심신이 두루 메마르다는 반증이다.



처음엔 자꾸만 눈이 시리고 침침해졌다. 충혈도 잦아지고 따끔대면서 이물감조차 느껴졌다. 잠깐씩 눈을 감고 쉬어주면 좀 시원해졌지만 그때뿐 눈의 피로감은 점차 심해갔다. 안경 도수가 안 맞나? 스트레스 때문인가? 진단 결과는 안구건조증으로 나왔다. 눈동자를 적당히 적셔줄 윤활유 구실을 할 수 있는 눈물 분비를 촉진시켜야 증상이 완화될 수 있다는 처방을 받았다. 나이 들어 호르몬 변화가 오며 눈물층이 메마른 까닭이기도 하지만 건조한 실내 환경이나 지나친 컴퓨터 작업 등이 눈물막의 균형을 깨는 주요인이라고 했다. 하는 일의 특성상 과도하게 눈을 혹사한 탓이리라. 어쩌겠는가, 꽤 오래 부려먹은 육신인 만치 좀 다독거려 가며 쉬게 해 줘야겠지.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심히 메마른 이즈음이다. 눈에는 인공누액이라도 넣는다지만 마음은 어쩐다? 이웃의 작은 일에도 뜨거이 감동하고 감격할 줄 아는 삶의 윤기를 되찾고 싶은데. 섬세한 현이 되어 사소한 떨림조차 놓치지 않고 반응하는 자신이고 싶은데. 한결 푸르러진 유월 숲처럼 정녕 웅숭깊어지고 향그러워지고 싶은데. 건조주의보는 여전히 발효 중이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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