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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9. 2024

무거운 짐 지고 비탈길 오르며

⁹⁹카미노 스토리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한하운의 시 '전라도 길'이라는 시다.

더위뿐인가. 어깨를 조이는 배낭무게에다가 비탈길 오르자니 천근 같은 다리에다 헉헉 숨도 차다.

저 아래 질펀히 펼쳐진 평원으로부터 완만하게 이어진 산.


별로 높지도 않은 언덕 정도 같지만 거의가 고개 숙인 채 땅만 보며 걸음을 옮겨놓는다.

체중을 분산시키려 스틱 잡은 손목에 잔뜩 힘이 들어간다.

가파른 고바우 등반도 아니건만 이미 지친 체력이라 너무 힘이 들어 서로 말조차 나누기 어렵다.

사서 생고생하는 카미노길, 그럼에도 낙오자는 별로 없다는 게 신기한 일.


장년의 두 남자가 스틱에 의지해 잠시 휴식, 마치 묵념드리는 자세 같다.  

길섶에 퍼질러 앉고 싶은 마음 굴뚝같으나 한번 앉으면 일어나기 싫어진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그대로 눈 감고 마냥 누워 귓가 스치는 바람소리나 듣고 싶어 지니까.

해서 되도록 앉지 않고 물도 서서 마시고 간식도 걸으면서 먹는다.

그렇게 에너지 보충한 다음 숨길 가다듬어 기운 차리고 다음 목적지까지 다시 꾸역꾸역 걸어야 한다.

대체 왜? 무얼 찾으려고? 얻고자 하는 게 뭔데?

 

생의 여로도 마찬가지였다.

삶이라는 길 위에 서게 되면서부터 태엽 감긴 인형처럼 자동으로 앞을 향해 움직여야 했다.

힘들다고 중도에 기권하거나 가기 싫다고 뒤로 뺄 수도 없는 외길이었다.

좋든 싫든 무조건 전진, 앞만 보고 걸어 나가야 하는데 거기에 묵직한 등짐까지 얹힌다.

욕망이라는 짐은 주위의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더 무거워진다.

남의 밥그릇 콩이 더 커 보였고 앞집 잔디가 한층 더 푸르러 보이니 부럽고 시샘이 나 내심 안달복달 스스로를 볶아쳤다.

정상 향해 가풀막진 산길도 억척스레 기어올랐으나 벌써 그 자리에 당도한 사람 있어 허탈감에도 빠졌다.

트랙 안쪽에서 달리는 사람이 보이자 운도 좋다 싶어 심술은 나지만 발을 걸고넘어질 수야 없어 배만 아팠다.

젊은이들이여, 야망을 품어라! 그래선지 젊은 한때 되고 싶은 것도 많았고 갖고 싶은 것도 숱하고 이런저런 바람도 컸다.

한창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읽히던 시절이라서 가급적 티를 안 내서 그렇지 딴에는 턱도 없이 드높았던 꿈과 이상.

그러나 깜냥이 안되고 그릇이 작으면 노력해도 소용없는 일, 안 되는 건 끝내 안 되는 일인 줄 몰랐다.

부질없이 용을 써봐야 허사임을 인정하고 포기하기가 그러나 젊어서는 쉽지가 않았다.

나이 스물여섯에 비교적 큰집을 지녔음에도 정원 딸린 이층 양옥집 부러워했다.

LG 다니는 직장인의 아내이면서 내과의사를 남편으로 둔 동창친구 부러워했다.  

잡문 나부랭이 쓰며 문단 언저리 맴도는 주제에 소설 쓰는 문우를 부러워했다.

이 나이에 이르고 보니 사람살이 오십보백보, 겉보기엔 포시러운 사람도 비단길 꽃길만 지나온 게 아니었다.

골고루 복도 많은 저 사람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시샘했으나 무언가를 누리는 만큼 치러야 할 비용이 따름을 간과했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내남없이 고비도 있었고 고초도 겪었고 아프고 힘든 가시밭 진창길 걷긴 마찬가지.

박완서선생이 그랬던가, 나이 드니 편해서 좋다는 말 정녕 맞다.

부러움 같은 거 모두 초월해 이제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에, 현실에 고개 주억여 수긍할 수 있어 그럴 수없이 편하다.

더 이상 욕망이라는 언덕진 비탈길 오르려 안간힘 쓰며 죽자 사자 기운 빼지 않아도 되니 그 또한 좋다.

다만 하늘 부름 받는 날,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고통스럽지는 않게 그저 천연스러이 나뭇잎 낙엽되어 흙으로 돌아가듯 그렇게 본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심판의 문 앞에서 허송세월하며 시간 낭비했다는 꾸지람 듣지 않을 만큼은 신실하게 살아야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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