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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0. 2024

청이를 롱우드 가든에서 만나다

눈은 꼭 감았다. 펄럭이는 남치마 한 자락 당겨 열다섯 여린 얼굴을 감쌌다.

환영처럼 언뜻 스치고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희디흰 버선. 이윽고 뱃전은 비어있다.

남치마보다 더 시퍼런 청남 빛 인당수. 출렁출렁 파도만 높다.

 

푸른 바람 일렁이는 옥수수밭 스치고 밀밀한 숲길 지나 찾아간 롱우드 가든.

간간 빗발 듣는 옥외정원에서는 마침 수련 축제가 열리고 있다.

은비늘로 이는 잔물결 사이사이 만개한 연화가 그날의 주제다.

워터 릴리로 통틀어 표기되어 있는 색색의 수련이 단아한 자태로 피어있고
보랏빛 물옥잠 귀엽게 솟아올랐다.

열대 우림이 고향인 듯한 맷방석 크기의 연잎도 떠있다.

아이 하나는 올라앉아도 끄떡없을 정도의 큰 잎새 주변에 반쯤 벙그러진 꽃봉오리 역시 큼지막하다.

자연스러운 연상작용에 따라 청이 설화가 슬그머니 대입된다.

그 꽃 안에는 어느새 다소곳 합장한 청이가 서있다. 동시에 심청가 한마당이 눈앞에 펼쳐진다.



판소리는 원래 시간을 정해 놓고 하지 않으니 얼마든지 늘어질 수도 있다.

어지러운 속도감에 길들여진 현대인에게 계면조로 이어지는 판소리 다섯 마당은 아무래도 지루하다.

해서 고수의 추임새 대신 오페라로 뮤지컬로 다채롭고 현란하게 꾸며지기도 하는 무대.

 유교의 윤리관인 효 사상과 인과응보를 가르치는 불교 정신이 적절히 버무려져
연화세계로부터 아름다이 환생한 청이다.

백련화로 졌다가 홍련화로 되피어난 청이, 청이와 연꽃은 하나다.

낮과 밤이 뒤바뀐 미국 땅 롱우드 가든 연꽃밭에서 뜻밖에 조우한 우리의 청이.

반가움에 눈가가 맵싸해진다.

연못가에서 한참을 서성대며 그날 나는 판소리 심청가를 ''으로 들었다. 아주 특별한 시혜였다.

 

호르르 이는 물비늘은 판소리의 파장 때문인가, 꽃 그림자 가늘게 떨린다.

어쩌면 산다는 건 항시 그림자를 남기는 일.

향기로운 그림자를 남긴 적보다는 일그러진 그림자를 남긴 적이 더 많았다.

앞으로의 날들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는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다.

산다는 게 갈수록 조심스러워진다.

수련은, 청이는 그림자조차 저리 곱거늘....

환몽이듯 아리따운 선물과 함께 성찰의 시간을 마련해 둔 오래 전의 프랑스인이 문득 고맙게 여겨진다.

그가 가꾼 정원에서 뒷날 한 동양인이 누린 청복, 그는 짐작이나 했으랴.

 

롱우드 가든은 기능성 섬유인 나일론사를 개발한 피에르 듀폰이 그의 병약한 부인을 위해 만든 정원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꽃다발을 받은 그녀.

하지만 듀폰은 "모든 이를 위한 전시와 교육 그리고 즐거움을 위해 사용"하라는 유언을 후대에 남긴다.

그의 사후 이 공원은 일반에게 개방되며 평화로운 휴식을 제공해 주는 쉼터 역할은 물론 어린이들의 자연교육장이 되도록 가꿔졌다.

그는 이민 가계의 후손이다.

프랑스 한 화학실험실의 조수였던 E.I 듀폰은 혁명의 와중에 그가 가장 존경했던 실험실의 학자 한 분을 잃고 만다.

편향된 사회 여론에 밀려 스승은 반역죄란 올가미가 씌워져 단두대의 이슬이 되고만 것.

프랑스혁명이 끝나자 회의에 젖은 듀폰은 미련 없이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1882년 브랜디와인 강가에 화학공장을 세운다.

 

얼마 후 세계대전이 발발하며 그가 만드는 군수용품은 수요가 폭증, 일약 군수 재벌로 우뚝 선다.

화학 소다로 만든 폭약이 당시 연합군 사용 폭탄의 거의 반을 차지했을 정도였다니
그를 죽음의 상인이라 칭할 만도 하겠다.

그러나 그는 부의 사회환원 방법으로 공장을 세운 주 전체의 세금을 전면 자신이 책임진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뉴저지와 인접한 델라웨어는 세금이 없는 주가 되었다.


이렇듯 그의 후광은 일대에서 여전히 빛을 발한다.

전후에는 합섬 고무와 합성섬유로 부를 축적시켜 제너럴모터스의 대주주가 되기도 했던 듀퐁가.

오늘날에는 핵 원료인 플루토늄과 오존층을 파괴하는 프레온 가스 등의 화학제품을 만들며 환경운동가의 날 선 표적감이 되고 있기도 하다.



언덕 위 듀퐁가의 저택에 들어서면 잘 보관 전시된 가구며 집기 등으로 이민 가정의 긴 역사를 한눈에 읽게 된다.

가든 경내에 세운 그리스 풍의 우아한 음악당에서는 명성 있는 관현악단이나 발레단을 초빙하여 유럽식 살롱 문화를 본뜬 특별공연을 갖기도 한다.

기념관을 중심으로 야외 공연장을 비롯 너르디너른 실내외 정원과 음악이 있는 분수공원

나무조각 공원 인공폭포와 호수 등이 적절히 배치되어 하루를 아름차게 즐길만한 롱우드 가든이다.

 

130만 평의 광활한 대지에 낙원 같은 조경으로 가꿔진 롱우드 가든.

철철이 피는 아름다운 꽃의 축제를 사철 펼치며

매번 새로운 볼거리를 준비해 두어 뭇 관람객을 매료시키는 곳.

대온실에는 세계 각국의 기화요초가 망라되어 있고 계절에 따른 축제 행사도

테마별로 흥미롭게 잘 짜여 있다.

이른 봄 튤립축제로 시작해서 줄을 잇는 장미축제 부활절 릴리축제 그리고 수련축제에 이어

가을 국화축제가 기다린다. 꽃철이 지나면 핼러윈데이 축제가 열리고

겨울철 나무마다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꾸며진 빛의 축제까지 어느 때 찾아도 환상적인 롱우드 가든이다.



이날은 세 번째 롱우드 가든 나들이다. 구름이 전면에 드리운 하늘,

쾌청보다 오히려 야외 나들이에 적당한 날씨다.

게다가 운 좋게도 때마침 수련 잔치가 절정을 이뤘다.

마침 신부님을 모시고 갔으니 동행인이 좋은 덕인가, 선한 인연을 지은 덕인가.

속 후련해지는 박동진의 창 '심봉사 눈 뜨는 대목'처럼 마음까지 확 트이며 개안이라도 한 듯

날씨와는 상관없이 세상이 온통 환한 하루였다.          2008 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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