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
문명의 발상지가 대개 그러하듯 큰 강가에는 으레 발달된 큰 도시가 있게 마련이었소. 템스강이 거느린 런던, 센강이 받침 하는 파리처럼 강 인근에서 하나의 마을이 생성되며 궁성이 서고 사원이 따르곤 하지요. 그들은 서로 어우러져 짜임새 있는 풍경을 만들어가며 그 안에서 번성과 쇠망을 거듭해 나갔더랬소. 그들이 남긴 영광과 패배의 흔적들을 보듬어 안은 채 그렇게 역사는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오.
전후 패전국인 독일을 다시 일으켜 세운 라인강. 흔히 라인의 기적을 말하곤 하지요. 그러나 자연이 준 혜택에 의한 것만이 아니라 근면 검소한 독일인이 일궈 낸 게르만 민족 고유의 국민성에서 비롯된 기적임을 우리는 익히 들어 알고 있소. 하지만 독일의 부흥은 온 국민의 노력과 더불어 라인이라는 젖줄과도 무관치는 않을 것이오.
기차 레일과 차도와 물길이 나란히 이어지는 라인강 연변. 양안에는 건강한 녹음이 짙푸름 일색으로 흘러내리는 산자락 줄창 따르고 고목 된 미루나무가 파수병이듯 강변을 지켰소. 강폭이나 유속으로 미루어 그리 대단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라인강인데 여러 종류의 배들이 쉴 새 없이 오르내리고 있었소.
라인에서 우리는 한 시간쯤 유람선을 타기로 했소. 아주 우람스러운 보리수 한 그루가 넓게 그늘 드리운 선착장에서 배에 올랐소. 비가 많은 철이라서인지 강물은 맑았으나 푸른빛은 아니었소. 하긴 잿빛 구름이 어깨까지 낮게 내린 칙칙한 날씨이니 물빛인들 고울 턱이 있으리까.
독일에 머무는 사나흘 간 청명한 하늘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더랬소. 환경이 성격을 만든다지요. 아무리 종달새같이 명랑한 사람이라도 이런 기후 조건대에서 계속 살다 보면 저절로 착 가라앉아 무거운 분위기가 되지 않을까 싶었소. 인간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시에 역사며 문화에 따른 영향 역시 크게 받는다오.
바람이 거칠게 불었으나 물결은 사납지 않았소. 물살 가르며 미끄러지는 이물에 서서 시원스레 바람맞이를 하는데 홀연 귀에 익은 멜로디가 들려오는 거였소. 바리톤 굵은 목소리에 실린 <로렐라이 언덕>. 이어지는 안내 방송은 독일어였지만 짐작건대 로렐라이에 대한 설명 같았소.
하인리히 하이네가 노래한 요정 로렐라이의 전설로 사뭇 기대되던 곳. 하건만 의외로 별 특색 없는 산언덕에 빨간 깃대 하나 나풀대고, 그 아래 물가 짬에 자그만 동상이 보였소. 금빛 빗으로 긴 머리채 빗질하며 노래 부르는 요정은 물론, 배를 삼킨다는 무서운 소용돌이도 보이지 않는 뱃길. 생각보다 하도 평범하고 수수해 유람선이 들려주는 음악이 아니었더면 무심히 지나칠 뻔하였소.
소문이나 명성에 비해 대단치도 않고 보잘것없는 로렐라이 언덕에서의 실망을 단번에 지워주는 풍경들이 곧이어 나타나기 시작했소. 비경의 숲과 고성들. 그것은 어쭙잖은 만회나 상쇄가 아니라 더 큰 감동과 충격을 주기 위한 연막전술이 아니었나 싶을 지경이었소. 그랬소. 로렐라이 언덕은 간단한 서곡에 불과했던 거요. 라인의 양 녘 산기슭을 메운 포도밭은 정녕 장관이었으며 삿갓 모양 뾰쪽 지붕을 인 교회와 집들은 모형 장난감만 같았소.
그뿐 아니라 산꼭대기에 드문드문 솟아있는 낡은 고성은 외국 영화에서나 봄직한 풍경들이었소. 쥐의 성, 고양이 성 등 이름도 특이하고 모양 역시 독특한 중세 고성들. 태양왕 루이 14세의 북유럽 진출 당시 피해를 본 성곽들은 파괴된 그대로 내부 수리만 해서 별장이나 호텔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하오. 멀리서 보기에는 운치 있고 근사하나 까욱까욱 까마귀 날고 있는 성에는 어쩐지 드라큘라 전설 닮은 괴괴한 사연이 서려 있을 듯하였소.
엷은 황톳빛이 주종을 이룬 프랑스 주택이나 오스트리아의 녹색, 주황 등 밝은 색채로 꾸며진 집들과는 달리 회색 아니면 검정이 대부분인 성들은 분위기 자체가 음산하기조차 하였소. 게다가 주변에 울울이 전나무가 둘러섰고 담쟁이 무성한 성채라 괴기 영화의 무대로 쓰이기에 알맞을 것 같았소. 쾌청한 날 이곳을 지나도 마찬가지 느낌일지 모르지만 하여간 여행으로 달떠 있던 기분이 얼마쯤은 가라앉아진 듯싶었소.
동시에 독일에서 왜 세계의 정신을 이끈 철학이 성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하였소. 또한 섬세 치밀한 정밀기기를 만들어 내는 데 있어 독보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까닭도 알 것 같았소. 날씨는 물론 주변 환경이 사색하고 연구하기에 이 이상 안성맞춤인 곳도 드물 것이란 느낌을 들게 하는 독일. 그 독일을 상징하는 라인강은 여전스레 도도한 물굽이로 영원히 이어질 테지요.
강변의 양쪽으로 제각금 멀어지는 고성과 마을들에 손 흔들며 라인을 떠나고도 한참을 더, 길고 긴 협곡은 강물 따라 흘러갔을 것이오. <부산 문학. 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