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
초현실파 화가 달리의 『기억의 고집』이라는 그림을 아실 겁니다. 열기에 녹아내린 듯 흐물흐물 늘어진 채 나무에 걸린 시계. 무의식 세계에 대한 회화적 접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유명한 그림이지요.
오래전,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만난 그 그림은 우리를 꽤나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습니다. 평소 익숙해 있기로는 고흐나 세잔, 좋아하기로는 빛의 화가라는 모네의 그림이며 꿈꾸듯 감미로운 화풍의 마리 로랑생 그림들이었으니까요. 정지된 시간을 나타냈다는 그림아래의 설명문이 또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었습니다.
현실을 떠난 상상의 세계를 추구한 달리의 그림. 달리는, 회상 속의 세계란 원래의 상태와 많은 거리감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따라서 기억의 변화를 정지된 시계로 상징화시켰다는 것이지요. 어쨌든 이성적 현실을 표현했다거나 합리적 세계를 포착해 그린 여느 그림과는 다른 비현실감이 생소하게 여겨졌습니다. 게다가 의식 세계에서는 시간의 정지란 불가능한 것이기에 혼란감을 불러일으킬 만했습니다.
달리의 그림이 문득 떠오르게 된 건 얼마 전 뜻밖의 체험으로 인해서였습니다. 회화를 통해 무의식세계로 접근한 달리와는 물론 다르지만 아무튼 그것은 현실 밖 신비스러운 현상과의 조우였습니다.
의식세계 밑에 감추어진 무의식세계는 욕구나 충동본능으로 구성돼 있다고 합니다. 그곳으로 잠시 여행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미리 계획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즉 의도적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번씩 무의식세계를 기웃대 보곤 했습니다. 기웃거렸을 뿐 정작 들어가진 않았습니다. 내가 머물 곳은 의식세계, 대신 은둔자가 되고자 했더랬습니다. 세상 밖으로 튕겨 나가 보길 원했습니다. 가뭇없는 잠적을 꿈꿔 보기도 했습니다. 희망사항이나 꿈은 어디까지나 자유일 수 있으니까요.
어쨌든 주변을 맴돌기나 하던 무의식세계에 나는 어느 한순간 진입했습니다. 명도가 서로 다른 보랏빛 스크린이 아롱거렸습니다. 오동나무꽃의 연보라에서 도라지꽃의 진보라까지 제각각인 보랏빛이 비눗방울처럼 몽롱히 떠돌았습니다. 무의식세계는 단언컨대 환상적인 보라의 세계였습니다. 심층 심리학에서 파악된 무의식세계에도 색채가 존재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접하기로는 분명 보랏빛이었습니다. 환각과도 같은 보라의 파노라마 속에서 나는 감미로이 파고드는 비애감을 즐겼습니다.
『검은 반주』라는 음악을 듣고 그 감흥을 화폭에 담은 칸딘스키의 그림도 있거니와 어딘가에 반응하는 정신적 반향은 각각 일 수 있겠지요. 어쨌든 나는 다른 세계로 떠나 있었습니다. 현실 파악을 기초로 행동하는 자아와 동행하지 않은 자유로운 여행이었지요. 아니 유영이라고 할까요. 구름 위의 산책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무아지경이 그러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떤 음악 때문이었습니다. 음악의 가락에 취해서였습니다. 최면요법에 음악이 바탕으로 쓰이는 것은, 그것도 부드러운 파스텔조를 골라 까는 것은 그럴싸합니다. 헌데 온전히 음악만으로 최면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비로소 알았습니다. 사물놀이패의 설장구 장단 따라 자꾸만 의식은 저 아래로 침몰돼 갔습니다. 눈은 어느새 감겨 있었습니다. 적당히 단순하면서 반복적인 리듬. 쿵쿵 울리는 가락에 맞춰 심장박동이 강약을 달리 했습니다. 장구소리는 차라리 가슴을 두드려 대는 것 같았습니다. 그 울림에 단단히 맺힌 고 한 겹이 스르르 풀리고 오래전에 막혔던 물꼬가 트였습니다. 후련스러웠습니다. 시원했습니다. 그러자 까닭 모를 눈물이 났습니다. 슬픈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눈물이 주르르 흘렀습니다. 그런 한편 헤실헤실 웃음이 나왔습니다. 종내는 한바탕 크게 웃고 싶었습니다. 묘한 현상이었습니다.
그뿐 아니었지요. 어느 장소에서든 좀체로 춤을 추지 않는 나였는데 어깨가 들썩여지고 손목이 리듬을 타는 거였습니다. 절로 허리도 움직여졌습니다. 신명과는 또 다른 아지 못할 기운이었습니다. 바람에 나는 민들레 씨앗처럼 가벼이 공중으로 떠오르는 기분이었지요. 겨드랑이께 까지 찰랑찰랑 차 오른 수면에 두 팔 벌리고 서있는 느낌이기도 했고요. 마음은 파도를 타는 듯, 훨훨 자유로이 나는 듯하면서 한편으론 지극히 평온했습니다.
절에서 참선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허리는 곧추세웠습니다. 그 동작에 익숙지 못한 까닭으로 금방 다리가 저리고 온몸이 뒤틀렸습니다. 화두를 잡고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오로지 이 뭣고? 하는 그 하나에 골몰하라 하지만 생각을 비워 낸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쉽습니까. 오히려 쉴 새 없이 머리 비좁도록 일었다 지는 망상으로 혼란이 왔습니다. 도무지 뭇 사념으로부터 놓여 날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단 십 분이라도 오롯이 참선에 몰두하고 싶었지만, 팔만 사천 번뇌망상이라는 말대로 별의별 잡념이 다 춤을 춰 댔습니다.
결국 초반에 포기해 버렸습니다. 차라리 절을 하는 편이 나았습니다. 염주 한알한알에 마음을 새기며 절을 하는 동안, 망상의 그물로부터 놓여 날 수 있었습니다. 하긴 선이란 어디에도 집착이 없어서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경계, 생각이 멈추어 버린 무심의 경지를 이름이지요. 참선은 마음을 가라앉혀 조용히 안정하고 자기 내부를 관찰하는 것입니다. 참선을 하므로 어두워진 마음 밝혀 무명에서 벗어날 수 있다 했는데 도대체 번번이 초반탈락이었습니다. 해서 옳은 참선 한 번 못해봤습니다.
의외로, 생각이 쉬어 버린 무심의 경지를 음악을 통해 느껴 보았습니다. 가락에 내맡겨진 자신을 나 아닌 내가 가만히 바라다보았습니다. 또 하나의 내가 분리되어 이만큼 떨어져서 건너다보니 연민이 느껴졌습니다. 생활로부터의 제약, 역할로부터의 구속, 그 답답한 장벽과 무거운 족쇄로 인해 숨 막혀하면서도 한치도 비켜서지 못하는 나약함이 가엾습니다. 그럼에도 웃고 있는, 아니 행복한 척 표정연기를 해야 하는 연극무대에서 그만 내려오고 싶었습니다. 잠깐동안의 무의식 세계여행, 그것은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욕구의 또 다른 표현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현실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충동은 누구나 느껴 보았을 것입니다. 주어진 여건, 몫 지워진 역할에 백 퍼센트 만족하는 사람은 그리 흔치가 않으니까요. 물론, 불만족스런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이 요구됩니다. 현실에 도전하여 그 어떤 철옹성이라도 뛰어넘고 말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아무런 시도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포기하거나 우회의 방법을 찾는 것은 비겁함일지 모릅니다. 허나 도저히 거스를 수 없는 큰 물결, 타개의 실마리가 전혀 잡히지 않는 막무가내의 벽 앞에선 어떤 개선 노력도 맥 못 출 수밖에요.
수시로 꿈꿔 보는 현실탈출. 그렇다고 아무나 『달과 6펜스』의 스트릭랜드를 흉내 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생활의 안정과 기존의 질서체제를 과감히 묵살하고 모험을 감행할 만한 용기며 기백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스트리랜드 하나이기 망정이지 더 많은 스트릭랜드가 나타났다면 가정붕괴로 아마도 사회는 걷잡지 못할 혼란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뿐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평생에 걸쳐 느껴야 할 정신적 부채감은 또 어쩝니까. 나아가 현실을 회피한다고 이미 짐 지워진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보다 적극적인 현실도피의 방법으로 간단히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자유의지로 생의 막을 내려 버리는 것이지요. 관점에 따라선 오죽하면 그랬을까 또는 얼마나 막다른 길에 처했기에, 하는 동정론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무모함입니다. 사회적 연관고리 속에 사는 인간이기에 무작정 용감무쌍하거나 지독한 이기주의가 아니면 쉽게 결행해서는 안 되는 일이겠지요. 너나없이 주어진 시간만큼 최선 다해 살아야 할 당연한 의무가 있는 것. 물론 태어남도 내 의지가 아니었듯 마지막 역시 신의 영역으로 남겨 두어야 함이 마땅하다고 봅니다. 죽음의 또 다른 이름인 돌아감, 소천(召天)이란 낱말을 나는 귀하게 여깁니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마지막, 끝의 의미가 아니라 하늘의 부르심을 받는 것. 원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늘에 오르는 신성한 그 의식을 어찌 함부로 치를 수가 있겠습니까.
어쩌면 바람직한 현실도피의 한 방법이 취미에 빠지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취미는 직업적으로 하는 일이 아닌, 즐기기 위해서 혹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즐기되 동시에 원 상태로의 환원을 전제로 합니다. 더러는 그 속에 송두리째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현실로 복귀합니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언젠가는 물리게 되고 무슨 일이든 결국은 염증을 느낄 때가 있게 마련이니까요.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나는 글을 씁니다. 음악에 잠기기도 합니다. 산행을 갑니다. 독서삼매에 젖어 봅니다. 여행을 떠나기도 합니다. 영화를 보러 갑니다. 근자 들어 인터넷 속에서 노니는 한가지 재미가 더 늘었습니다. 이런 취미들은 술이나 약물에 취하는 것과 달리 중독 현상은 물론 금단 현상이 없으니 백배 나은 방법이라고 자부합니다만, 여기에도 제동은 걸립니다. 그 제약이 싫습니다. 사람을 서서히 압사시키는 구속감, 갈증은 증폭됩니다. 그게 견딜 수 없어 또 무언가 도피처를 찾게 됩니다.
창 밖엔 장마 비가 거칠게 내립니다. 일본열도를 스쳐 지나간다는 태풍의 영향 탓인지 바람도 사납습니다. 덜컹거리는 창틀에 얼굴 찧는, 접신한 무녀의 휘파람 소리같이 괴이쩍은 바람. 이처럼 분위기 스산한 날엔 밝고 가벼운 피아노 곡을 실내 가득 방류시킵니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에 이어지는 선율은 라벨의 피아노곡 『물의 유희』입니다. 기분전환을 시도해 보고자 볼륨을 좀 더 높여 봅니다만, 잿빛 공간의 칙칙함으로부터의 탈출은 쉽지가 않습니다.
자꾸만 물 젖은 솜처럼 무겁고 찌뿌둥해지는 심신. 아예 차렵이불 덮어쓰고 한숨 자는 게 나을 듯합니다. 잠 역시 현실로부터의 확실한 도피처가 돼 줍니다. 의식도 함께 잠들 수 있으니까요. 누워 보니 장마 통에 돗자리가 눅눅히 습기를 머금었습니다. 방을 약간 덥힌 다음 가벼운 읽을거리를 꺼내 글줄을 따라가 봅니다. 어쩐지 활자여행이 재미가 없습니다. 물론 집중도 안됩니다. 조립되지 않은 단어 낱낱이 떠다니며 정신만 괜히 산란스럽게 합니다. 한 페이지 넘기기가 수월치 않습니다. 차라리 책을 덮어 버립니다. 그냥 잠을 청해 보지만 밤새 깊은 잠을 잔 까닭에 눈감아도 잠은 오지 않습니다. 가늘게 눈꺼풀이 떨립니다. 그만 눈을 떠버립니다.
여전히 빗줄기는 거셉니다. 천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로 희뿌옇게 내립니다. 어느 사이 피아노 모음곡은 멈춰 있습니다. 이번에는 김영동 님의 명상음악을 걸었습니다.『귀소』는 언제 들어도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습니다. 더구나 오늘 같은 날, 그 음악과 더불어 제대로 명상여행을 떠날 수 있겠습니다. 타고르는 그의 글에서 명상이란, 나 자신을 벗어나서 만물과 하나가 되기 위해 어떤 커다란 진리 속으로 들어가 끝내는 우리가 그 진리의 소유가 되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때 우리에겐 두려움도 손실감도 다 없어져 단순하고 자연적인 상태, 자유 그 자체가 된다 했지요.
내면으로 떠나는 여행인 명상. 그에 앞서 온몸의 긴장을 풉니다. 편안하게 이완되는 근육. 얼굴은 자연스럽게 펴고 가벼이 눈을 감았습니다. 단전호흡 수련장에서 익힌 대로 숨을 깊이 들이마신 다음 천천히 토해내기를 반복했습니다. 이때 들숨에는 맑은 기운을 마시고 날숨에는 마음속 탁기를 토해낸다는 생각으로 호흡에 집중해 보았습니다. 오로지 호흡에만 온 신경을 모았습니다. 억지로 생각을 끊고 마음을 비우려 노력하면 할수록 정신이 산만해지며 흙탕물이 이는 경험을 이미 해봤기에 그냥 있는 그대도 조용히 놔두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끊어야지, 비워야지 하는 자체가 강박관념이 되어 숨 가쁘게 하니까요. 그마저 집착임을 안다면 진작에 버려야 함도 자연 깨닫게 됩니다.
호흡에 집중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심신이 깊은 휴식상태에 들어갔습니다. 나란 존재는 어느새 사라져 버렸습니다. 어쩌면 나는 우무질 같은 한 덩어리 물질, 따로이 머리가 없고 손이니 발이니 하는 개념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아주 평온한 상태였습니다. 고요하고 아늑했습니다. 모태 속이 그러할까요. 참으로 평화로웠습니다. 의식이 차츰 가물거렸습니다. 세사에 부대끼노라 잠시도 쉼 없이 출렁대던 가슴속 파랑도 잠재워졌습니다. 용광로로 타던 미움, 원망, 피해의식들은 얼마나 치졸스러운 감정인지요. 새삼 그 바닥이 들여다 보였습니다. 싱그레 미소 한 점 감돌았습니다. 웃으면서 어느 결에 잠이 들었습니다. 행복한 도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