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중 김충현, 시대를 쓰다 ㅡ소암기념관에서

by 무량화

인터넷 세상이 되며 서예가 뒷전으로 밀려난 시절이다.

그럼에도 한자문화권에서는 그 빛 퇴색 될 수 없는 서예다.

서귀포시 서귀동 소암로에 있는 소암 현중화 기념관.

서예와 서화로 이름을 남긴 소암 현중화 (1907~1997) 선생의 삶과 예술을 한자리에서 조명하는 기념관이다.

전(篆)·예(隸)·해(楷)·행(行)·초(草) 등 모든 서체에 능한 선생은 특히 자유스럽고 활달한 초서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일본에서 배운 서예를 제주에서 승화시킨 선생은 평생 쌓아온 예술의 정수를 고향에 기증하였고 도에서는 기념관을 세워 그 뜻을 기렸다.

소암 선생이 생전에 거주했던 조범산방에는 소암의 유품과 일대기 전시실, 상설 전시실, 기회전시실, 창작산실로 꾸며졌다.

이 기념관에서는 선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제주 소묵회의 작품전이나 타 서예가의 추모전 및 예술 강좌 등 활동을 펼쳐나가고 있다.

상설 1 전시실에는 소암 선생의 예술혼과 글씨 미학을 엿볼 수 있는 대표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소암선생은 서귀포 법환 출신으로 제주의 대표 서예가이다.



마산에 사는 여고 동창은 칠십도 훨씬 넘어 서도에 입문했다.


그녀는 병원장 아내로 도예, 분재, 수석, 원예, 목각, 다도 등 여러 취미를 섭렵하며 고아한 자기 세계를 가꿔왔다.


서예를 시작한 지 이태 만에 경남 서도대전에서 특선을 했다는 낭보를 전해왔다.


연달아서 올 대한민국 서도대전에서 또 특선을 했다길래 한껏 축하를 해줬다.


소 뒷걸음치다 쥐 잡았다며 그녀는 겸양을 표했으나 나는 안다.


그녀는 본디 달필이었다.


같이 시험공부를 하다가 넘겨다 본 그녀 필체는 매우 출중했다.


시원시원 남성적으로 활달하게 써제키는 그녀 글씨를 보노라면 내 작고도 오종종한 글씨체가 싫어졌다.


그렇다고 본디 타고난 솜씨라는 건 노력만으로 쉽게 개선되거나 바뀌어지지 않는다.


젊어 한때 서예를 배우러 다녔다.


처음엔 먹 갈며 시간 축냈고 그다음엔 길 영(永) 자 쓰느라 작대기만 죽죽 긋다 보니 도대체 흥미진진하긴커녕 진력부터 났다.


永이란 글자를 가지고 한자의 여덟 가지 획의 모양을 연습하는 영자팔법(永字八法)에서 이미 걸려 넘어져 그만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소질이 없으면 분발해서 노력이라도 더 해봤어야 하는데 그런 끈기와 오기조차 없었다.


타고난 재능을 뒤늦게 계발(啓發)해 잠재돼 있던 실력을 연마한 결과 일취월장 빛나는 성취를 이룬

친구.


사람마다 타고나는 능력 나아가 재능은 각자 다르다.


친구 말대로, 그녀에게는 붓 끝에 나에게는 펜 끝에 하늘에서 부여해준 작은 재주가 있음이니 내 몫으로 주어진 것에 자족하며 감사할 일 맞다.




11월 들어 소암기념관에서 '일중 김충현, 시대를 쓰다' 전시회가 열렸다.

김충현 선생 특별전이었다.

일중 선생은 근현대서예가들 중 한글과 한문서예에 두루 정통했던 서예가다.

명필, 국필로 일컬어지는 일중 김충현(1921~2006) 선생은 일중체(一中體)가 탄생될 정도로 우리나라 서예의 상징이다.

일곱 살 때부터 안진경체를 쓰기 시작, 전서와 예서, 해서, 행서, 초서까지 한문 5체를 모두 섭렵하였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선생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 등 옛 판본체를 바탕으로 한글 서예 교본을 완성시켜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

평생에 걸쳐 출판한 서예교재들과 함께 그가 남긴 7백여 기의 비문과 동상 목록만으로도 한국 서예사에 새긴 족적이 짐작된다.

경복궁 건춘문, 유관순 기념비, 이충무공 한산도 제승당비, 한강대교 표석, 사직단 현판, 김소월 시비 등이 그의 글씨다.

서예 하나만을 충심으로 섬기며 꿋꿋하게 나아간 그의 행보는 ‘중심(中心)을 잘 잡고 살아가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남겼다.


그러나 아무에게나 가능한 주문은 아니다.


학부에서 대학원에서 나름 전공이라는 걸 하고도 진로문제로 갈팡질팡하는 요즘 세태에, 외곬로 한 길만을 곁눈팔지 않고 오롯이 걸어가는 이 흔치 않다.

탄탄대로다 싶으면 가차없이 본래 전공 버리고 로스쿨이니 의전원이니 곁으로 새 버리는 젊은이들 부지기수인 세상.


이 나이에 이르니 사실 중심(中心) 잘 잡고 살아가기가 쉽지 않더라는 걸 알기는 알겠다.


자기 주체성에 따라 자신만의 기준과 원칙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굳건하게 행동하며 균형 잡힌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축복은 결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레 접어버릴 일도 아닌 것이, 하늘은 분명 우리 모두에게 그 기회를 허락해 주셨다.


각자 손에 쥐어진 붓이든 펜이든 칼이든 바늘이든 줄자든 망치든 끌이든 마우스든, 일념으로 즐거이 맡겨진 분야에서 정진하다 보면 보람도 거두련만.


묵향연중 -먹의 향기 속에 인연은 깊어지고
화목련실 -목련꽃의 집을 뜻함
숙필시연 -익숙한 붓으로 벼루를 써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