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0년대 초였다. 무슨 일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으나 전날 대판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은 아침도 안 먹고 현관문을 탁 닫고는 출근해 버렸다. 한바탕 더 결전을 벌일 작정이었는데 휑하니 나가버리자 화가 나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집에 틀어박혀 혼자 속을 끓이기보다 울화 다스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서둘러 외출준비를 하고 극장가가 몰린 남포동으로 나갔다. 영화의 바다에 푹 빠져 잠시나마 들끓는 화로부터 놓여나고 싶었다. <양들의 침묵>을 그렇게 보았다. 어깨 바짝 움츠린 채 심리스릴러물인 영화를 보는 두 시간여, 내 처지마저도 잊고는 정신없이 영화에 몰입돼 갔다. 긴장감 넘치게 화면 가득 펼쳐지는 공포와 전율 어린 장면들. 개봉관이지만 좌석이 거의 비다시피 한 조조할인 시간대라 더 오싹했다, 영화가 하도 무섭고 끔찍해 입가심 삼아 연달아 다른 극장에서 <K2>를 보고 나오니 점심때가 지났다. K2는 한 시간 40분 동안을 침 꼴깍 삼키며 영화 속으로 빠지게 할 만큼 몰입감 높은 영화였다. 극한상황에서의 생존 드라마인만치 어드벤처 영화가 안겨준 박진감 덕에 아침녘 노기 같은 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를 생각나게 하는 몰입도 최고인 영화를 간만에 보았다. <던커크> 기사를 읽은 다음이다. 뉴스 기사를 쓸 때 지켜야 하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란 기본원칙을 성실히 따른 글이었다. 대화는 별로 없고 영상과 음향만으로 영화가 진행된다고 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럴싸하게 꾸민 SF 영화나 슈퍼히어로 블록버스터 영화 또는 싱거워빠진 좀비영화도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역사물이라고 했다. 르와르물 영화나 역사물 또는 전쟁물은 즐겨보나 무협영화를 비롯 좀비영화는 슬쩍 스쳐라도 본 적이 없다. 던커크는 딱 내 취향에 맞는 영화라 지체 없이 상영하는 극장부터 검색해 봤다. 아이맥스 상영관은 너무 멀어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는 극장엘 갔다. 관람료는 겨우 5불인데 반해 실내를 살롱처럼 꾸민 데다 좌석은 응접실 의자처럼 편안했다. 평일 낮시간대라 관객은 대여섯 뿐이었다. 기분 나쁜 고요 속에 불현듯 요란한 총격소리와 눈발처럼 삐라가 쏟아지면서 영화는 시작됐다. 상영시간 한 시간 46분이 어찌 지나갔는지 모르게 지나갈 정도로 과연 시종일관 긴장도를 늦출 수 없게 만들었다.
<던커크> 한국에서는 덩케르크라 불린 영화. 1940년 5월 프랑스 북부해안 던커크(Dunkirk)에서 연합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오퍼레이션 다이나모(Operation Dynamo)’를 배경으로 한 영화다. 프랑스가 국경요새 마지노선(Maginot line)을 철석같이 믿고 방심한 사이, 독일 기갑부대가 허를 찔러 진격해 왔다. 전차로는 도저히 지나기 힘든 고원지대이자 울창한 삼림지역인 아르덴으로 우회, 프랑스를 기습침공한 것. 그 바람에 연합군 주력부대인 영국 프랑스 벨기에군 40만 명이 퇴로가 없는 막다른 골목까지 밀려 던커크 해안가에 고립된다. 포위망 가까이 바짝 다가온 적의 포소리에다 하늘에서는 폭격을 퍼붓는 전투기, 사방에서 조여 오는 죽음의 공포에 짓눌려 병사들은 패닉상태에 빠진다. 그들을 사지로부터 구출하되 독일군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은 그렇게 시작됐다. 세계 전사에 유례가 없는 사상 최대규모의 탈출작전이자 민간인이 적진 앞까지 침투해 군인을 구한 작전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때 막대한 양의 전쟁장비는 고스란히 적지에 버리고 인명만 구할 수밖에 없었으니, 연합군의 물적 손실은 엄청났다.
놀랍게도 독일 기갑사단 바로 코앞에서 9일 동안 도버해협을 통해 연합군 338.226명을 살려낸 기적 같은 작전은 성공했다. 물론 기상 조건이 도와줬고 목숨을 건 영국 공군의 놀라운 투혼 덕분이기도 했다. 흐린 바다안개와 잔잔한 영불해협이 일조했으며 공군기의 효과적인 반격과 엄호가 따른 덕이었다. 그래도 다이나모 작전 기간 동안 구축함과 병원선 등 수척이 포격 당해 침몰됐으며 그 와중 수만 명의 병사들이 죽었다. 무엇보다 이 작전이 성공할 수 있었던 데에는 불가해한 상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독일 육군은 이미 5월 24일, 던커크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한 형세였다. 절체절명의 순간, 뜻밖에도 히틀러는 전군에 진격정지 명령을 내렸다. 이에 대해서는 역으로 연합군의 결사항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공군만으로도 포위망에 갇힌 연합군들을 섬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자기 과신 등 여러 설이 분분하다.
이 영화는 전쟁에 관한 영화이기보다 생존에 관한 휴먼 드라마다. 저마다 생존본능에 따라 총탄을 피해 도망치느라 우왕좌왕하는 병사들. 전장에서의 최대관건은 무조건 살아남는 일이다. 전쟁터에서는 살아남은 자가 곧 승자다. 따라서 지상최대명령은 생존에 집중하라, 이다. 오직 '생존'만이 절대 명제인 것. 그러나 총알은 향방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수시로 날아온다. 포탄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때마다 바로 옆 동료가 피를 흘리며 맥없이 쓰러져버린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두렵고 위협적이다. 혼란의 아비규환 속에서 죽음을 피하고자 안간힘을 쓰는 병사들과 그들을 살려내기 위해 희생 바쳤던 사람들, 그들은 말 대신 동작과 눈빛만으로 교차되는 만감을 표현한다. 뭍과 하늘과 바다, 영화는 각각의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따라가며 객관적으로 '다만' 보여주고 들려준다. 컴퓨터 그래픽을 쓰지 않기로 유명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이 긴장감을 시각적 영상으로 서술했다면, 한스 짐머의 OST는 바로 옆에서 전쟁을 겪는 듯한 극도의 사실감으로 공포에 떨게 한다.
<던커크>는 사실에 충실한, 거의 다큐 같은 영화다. 전쟁영화이지만 그저 전쟁을 보여줄 뿐 격렬한 전투의 스펙터클한 면모나 전쟁 영웅들의 무용담은 나오지 않는다. 일관된 스토리도, 주인공도 없다. 언뜻 따라잡기 힘든 줄거리에 뚜렷한 캐릭터를 두지 않은 데다 대사량이 매우 적은 독특한 영화다. 던커크 해변에서 필사적인 철수구출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여타 설명 없이 행동과 표정만으로 모든 상황이 묘사된다. 영국군 조종사는 고글 속의 눈빛에 살신성인의 결기가 담겨있으며, 목선을 이끌고 구출작전에 참여한 선장의 인도주의는 묵묵히 피아를 넘나든다. 시종 긴박감을 고조시키며 쿵쿵 울리는 포소리 같은 음향은, 관객이 당시 던커크 현장에 있는 것처럼 현실감 있게 생생히 전해진다. 아이맥스 화면이라면 극대화된 공포감에 휘말려 졸도할 거 같겠다. 이쯤으로도 수없이 소스라치며 오금이 저려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으니까. 온몸이 경직될 정도로 긴장해서인지 집에 오니 어깨가 다 뻐근했다. 그만큼 던커크는 몰입도 그만인 영화였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감동적인 장면들을 허다히 접하게 되는데, 특히 모기함대(mosquito armada)의 활약은 감동 그 자체였다. 대규모 구출작전을 펴기 위해 영국군은 전투함부터 급히 모았으나 40만 명을 이동시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다. 처칠 수상이 이끄는 영국 전시내각은 전국의 모든 배를 징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민간 선박들이 서슴없이 달려왔다. 화물선, 유람선, 호화 요트, 고깃배, 학교 실습용 보트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뜨거운 애국심으로 무장한 채 바다를 덮은 크고 작은 배들. 이렇게 모인 861척의 선박들로 구성된 민간함대가 도버해협을 수십 차례 오가며 사람들을 날랐다. 당시 목숨을 건진 병사들은 후에 노르망디 상륙작전 시 나치를 격파하는데 선봉에 서므로 보국충절을 다하게 된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승리 뒤에도 작은 어선들의 활약이 있었다는 내용을 김훈의 <칼의 노래>에서 읽은 기억이 났다. 다시 책을 펼쳐봤다. 그때도, 연안 물길을 훤히 꿰고 있는 현지 어부들이 길라잡이 역할을 해주었을 뿐만이 아니었다. '명량 전투 시 장흥 백성 정명설과 해남 백성 오극신이 아들들을 배에 태우고 싸움의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배는 어선이었다....... 정명설이 노를 잡고 두 아들이 작살로 적병의 머리를 찍어냈다. 적병이 난간에 매달리자 어선은 기우뚱했다. 적탄이 정명설의 가슴에 박혔다. 아들이 쓰러진 아비를 어장 위에 눕혔다.' -111쪽- 이처럼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면 분연히 일어서는 건 민초들이다. 국록 덕에 살찐 왕족이나 권세가들은 몸 바쳐 나라를 구하고자 나서기보다 일신의 안위부터 챙기려 든다. 예나 이제나 그 현상은 마찬가지다. 현재 국난을 당하면 먼저 해외로 도망칠 자 누구일지 역시 그림이 그려진다. 영화 잘 보고 와서 괜히 그쪽으로 생각이 미치자 열이 또 끓어오른다. 못 말리는 이 열혈성!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