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보목포구에 갔다.
지난번 딸내미가 니콘 카메라를 사다 준 터라 연습도 해볼 겸 반짝대는 윤슬을 담으려고 갔었다.
아주 가까이 근접할 수 있는 바다라면 자구리 해변도 있으나, 보목에서 소천지로 해서 칼호텔 거쳐 좀 걷고도 싶어서였다.
서귀포 원도심 날씨는 청명했으며 바람결 부드러웠다.
그러나 웬걸, 보목포구 앞바다는 완전 딴 얼굴이었다.
파도는 연신 성난 야수처럼 포효했으며 해풍 사납게 휘몰아쳤다.
쉼 없이 밀려와 해변에서 하얗게 산화하는 파도.
바다는 어느쩍 분노인지 마구 몸부림치며 혁명군처럼 함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아니면 뜨거운 열정 주체 못 함인지 사뭇 용트림하고 있었다.
그렇게 파도는 길길이 날뛰며 달겨들고 있었다.
태풍 특보가 내린 것도 아닌데 이 무슨 변고람!
심상치 않은 바람이라 일단 모자를 벗어 가방에 넣고 자킷 지퍼를 다 채웠다.
새 카메라는 소금기에 노출시킬 수 없어 폰으로만 빠르게 파도 사진을 담기로 했다.
주저 없이 전신 흔들어대는 광란의 바람 속으로 성큼 나섰다.
방파제 가까이 다가갔다.
테트라포드를 강타하며 부서지고 또 부서지는 파도, 포말이 얼굴에 튀겼다.
세차게 휘몰아치는 바람의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신열에 들떠 한껏 들끓는 바다.
매번 새로워 젊디 젊은 파도는 그 일회성에 목말라 끝없이 이어지는 것일까.
바다 저만치서 굼실거리던 몸짓은 숫제 치달리는 백마군단이었다.
끝내 파도의 흰 갈기 앞세우고 번개치듯 달려와 바윗전을 휩쌌다.
그리고 부서졌다.
산산조각으로 조각져 흩날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끊임없이 밀려와 거듭거듭 으깨지지 않을 수없는 격렬한 사랑을.
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와서 허무로 끝나버릴 수밖에 없는 그 처절한 사랑을 영겁토록 해야 하는 파도.
머물러 붙잡아 매어둘 수 없는 순간의 사랑, 아니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이 안타까워 종내 가슴으로 맞부딪쳐 사라지고 싶음인가.
목전 바로 앞 푸른 섶섬, 중섭이 그토록 가슴 저려하며 그리워했던 남덕이 거기 오버랩됐다.
저만치 떠있는 지귀도, 안 그래도 얇으레 한 섬인데 거센 파도의 위용에 그만 가라앉을 거 같았다.
어느 순간 나의 지귀도가 사라질 거만 같았다.
눈을 감고 샤먼처럼 두 팔 벌린 채 기도인지 심호흡인지를 하고 또 했다.
아 아 그럼에도 새디스트이듯 전율에 떨며 느끼는 이 격한 후련함이라니.
가슴에 응어리진 상처, 심저에 용암으로 가라앉은 번뇌까지도 흔쾌히 녹여줄 듯했다.
마구 휘감기는 채찍에 후드껴 내닫는 말처럼, 바람의 갈기에 전신을 난타당하면서 짜릿한 쾌감을 즐겼던가.
나는 파도이고 싶었다.
파도처럼 살고 싶었다.
그러나 우리라는 관계의 고리에 얽혀 한 발자국도 비켜설 수 없는 질긴 인연의 사슬을 이 또한 어이하랴.
따스하게 스며드는 이 곡진한 감정은 하지만 또 어찌할 거나.
사랑하는 마음이란 일부러 작정하고 만들어 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갑자기 들이차는 조수다.
저절로 부풀어올라 피어나는 꽃망울이다.
사랑의 시작은 우연에서 비롯되어 향방도 질량도 예측불허이자 막무가내다.
더욱이 너무도 느닷없어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에 돌발적이고 운명적으로 안겨드는 게 아니던가.
그러렴, 순간의 화양연화 그래도 후회 없을 사랑이라면 타오르고 또 타올라 마침내 무화(無化) 되려무나.
격랑의 포구를 벗어나 들뜬 가슴 식히려고 외돌개로 달려왔다.
하나로 이어진 같은 서귀포 앞바다인데 이럴 수가.
극적인 반전이라 너무도 신기했다.
평화로이 멧새 숲에서 노래하고 웃음 날리며 거니는 탐방객들.
그도 그럴 것이 바람은 온기조차 머금어 따스했다.
더없이 고요한 수면, 파도는커녕 잔잔한 바다에 은빛으로 반짝대는 윤슬 윤슬들.
저만치서 좌선에 든 범섬이 의젓이 무게를 잡아주어서인가.
외돌개가 진중하게 해저 깊이 뿌리내리고 명상에 잠겨서인가.
광기 어린 한바탕의 질풍노도, 격정을 잠재우자 불길 잦아들며 이윽이 찾아드는 평온.
주변 환경이나 분위기가 감정을 이리 제멋대로 휘두를 수 있다니, 아니 이 나이에도 그에 맥없이 휘둘리다니.
잠시 마법의 주문에 걸렸던가 보다.
아니면 독감에 걸리듯 격렬한 열꽃 한번 피워올렸던가 보다.
그 덕에 잠시 딴 세상에 편입돼 봤으니 어찌보면 한바탕의 백일몽도 근사한 꿈 한자락.
가끔은 그런 기막힌 정신적 엑스터시를 맛본다는 것도 뭐 나쁘진 않으니.
처절한 아름다움 앞에 우린 왜 그만 눈이 스르르 감기는지도 체험해 봤으니.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