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카톡으로 친우들과 설악산 등반 다녀온 사진을 여러 장 보내왔다.
가을 풍악산 이름대로 숯불 괄게 붙은듯한 빛부신 단풍 사진을 보며 역시나! 자동적으로 나온 감탄이었다.
바람 고요한 대관령에서 비박을 했다며 야영장의 따스한 불빛도 딸려 보냈다.
단풍은 역시 설악이네, 두루 참 보기 좋구나. 곧장 몇 자 찍어 보냈다.
한국의 봄은 남도에서 비롯돼 북상하고 가을 단풍은 설악에서 시작돼 점차 남으로 내려온다.
올해 설악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시기는 예년보다 일주 정도 늦어 시월말부터였다고 한다.
올 들어 비경으로 손꼽히는 오색지구의 남설악에 더 많은 사람들이 찾은 모양이다.
자연 속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아들 모습도 반갑지만 설악 단풍 사진도 참으로 반가웠다.
만산홍엽, 여전히 설악 단풍빛은 눈이 부셨다.
투명한 노랑빛 선연한 진홍빛에 취해서인가, 홀연 설악의 추억들이 파노라마 되어 바로 어제 일인양 또렷이 펼쳐졌다.
차멀미로 시난고난 눈도 못 뜨다가 미시령을 넘자 동해바다다~외치는 소리에 혼미하던 정신이 초롱해지던 기억.
가물거리는 기억의 불씨에서 모닥불이라도 활활 피워 오르려는가. 온갖 추억들이 다 되살아난다.
비선대 반들반들한 암반 쓰다듬으며 흐르는 수정 같은 계류에 손 담그고 장난질치던 단발머리들.
출렁다리 건너 암벽을 타고 곧장 내리지르는 비룡폭포 위용에 감탄사 연발하던 우리들.
수직 암릉 철계단 난간에 의지해 오금 저리며 올랐던 금강굴과 아슬아슬 흔들바위.
산정에서 내려다보자 발아래 계곡마다 색색 비단폭 드리운 듯 화려하게 불타던 오색찬연한 단풍.
이른 아침 천불동 골짜기를 타고 피어오르던 몽환적인 뽀얀 안개와 까마득 높이 둘러섰던 울산바위 군.
콸콸 여울지는 계곡 청류에 푸푸 세수하며 서로 물튕기기 할 때 목덜미로 떨어지던 얼음쪽같이 시린 물방울의 기억이며.
오래전 수학여행 가서 눈에 새겨 넣고 마음에 그려 넣은 풍경들이 신기하게도 수십 년 세월 거슬러 천연색으로 되펼쳐졌다.
설악 특산인 머루주에 몽롱해져 곯아떨어졌던 여행 마지막 밤이며, 하다못해 쉰 도시락 생각까지도 떠올랐다.
소홀한 대접받는 단체팀이라서인지 우리에게 할당된 나무 도시락은 시큼하게 삭아 있어 점심 쫄쫄 굶고 가을비 내리는 비선대 올랐으니까.
설악산을 다녀온 후 담임교사의 주문대로 우리는 여행기를 써서 개인 기행문집 비슷한 걸 엮었다.
그 이전엔 주로 교지에 시를 발표하곤 했는데 설악 여행기를 통해 처음으로 기나긴 산문을 쓰게 된 셈이었다.
누렇고 허접한 갱지를 반절 접어 털실로 중앙을 묶어서 노트처럼 만든 다음 펜촉에 잉크 찍어 글을 써 내렸다.
정비석의 '산정무한' 흉내 낸 글을 여나믄 페이지에다 적고는 여행지에서 찍은 흑백사진도 더러 붙이고 컷도 그려 넣었다.
그땐 지금같이 질 좋은 순백색 A4 용지나 스템플러가 당연히 없었으니 조잡하기 그지없는 수준의 기행문 노트였다.
선생님이 칭찬한 그 노트를 급우들이 돌려가며 읽어주는 바람에 제법 우쭐하기도 했었고. ㅎ
그리곤 까맣게 잊혔던 글인데 큰아이 초등 삼 학년 때 학부모로 백일장에 따라갔다가 '고향'이란 시제에 따른 글을 쓰게 됐다.
난생처음 원고지에 쓴 그 산문이 운 좋게도 선에 들어 수상을 하며 다시 글과 만난 것은 80년도 일이다.
설악산 다녀와 장문의 여행기를 썼던 여학생은 어느 결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됐다가 할머니 되어있었고.
아들이 보내준 설악산 사진을 보고 있노라니 홀연 오래전 수학여행 생각부터 떠올랐다.
이상스러운 일이다.
설악산은 그 외에도 서너 차례 더 다녀왔는데 수학여행 때 기억이 어째서 맨 먼저 나는 걸까.
첫인상이 중요하듯 첫 기억이 그만큼 강렬한 것인가.
백담사에서 수렴동 계곡 타고 오세암에 들어 하룻밤 유한 다음 새집처럼 바위에 얹힌 기도도량 봉정암에 올랐다가 대청봉으로 넘어간 적도 있었다.
일부는 三寺순례만 하고 희망자에 한해 설악산 등반도 겸하기로 한 일정이었다.
당시 아들이 대입 수능시험을 앞둔 고 3이었으니 한참 기도가 필요할 때였기에 한국에서 최고 높다는 봉정암을 찾았던 것.
이후 전방인 인제에서 군의관으로 근무 중인 아들을 보러 간 길에 원통골 내린천 한계령 쪽으로도 몇 번 돌아다녔다.
그러니 산정과 계곡 곳곳 설악 언저리를 거의 다 섭렵한 셈으로, 수차 설악의 가을 단풍에 취해보기도 했었다.
헌데도 의식 깊이 침잠돼 있을 초년의 기억이, 가장 늦게 저장된 기억보다 더 선명하게 되살아남이 희한하다.
요즘 나의 기억회로라는 게 이처럼 묘하게 작동된다. 신기하면서도 얄궂은 현상이다.
가까운 기억부터 차례에 따라 순차적으로 떠오르는 게 아니라 불쑥불쑥 옛일이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이게 나이듦일까.
여고시절 수학여행을 갔던 60년대 설악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