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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Jun 02. 2024

메꽃의 기억, 그 영화

다섯 시 무렵 일출을 보러 나갔다.


구름 한 점 없는 수평선, 하늘 이리 무표정한 날 일출은 밋밋해서 아무런 묘미가 없다.  

탐석이나 할까 하고 자갈밭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래밭 끝나는 곳에 모리모리 피어난 분홍꽃이 보였다.

갯메꽃이었다.

어릴 적부터 낯 익힌 갯메꽃은 바닷가 모래벌판 바닥에 난작 엎드려 기다시피 하는 덩굴식물의 꽃이다.

해안 돌 틈에 뿌리내리고 왕성한 번식력으로 자리 넓혀가는 갯매의 통통하고 하얀 뿌리는
달달해서 봄철 싱아처럼 씹기도 했다.

 일반 메꽃은 이파리가 엷고 덩굴 뻗어 들풀 마구 감아 오르는데 아직 꽃 피려면 멀었건만, 갯메꽃은 이미 제철이다.

강아지 꽃이라고도 불렀던 메꽃은 나팔꽃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양쪽 다 연연한 연분홍색이다.

이 꽃을 보면 동시에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70년대에 봤으니 아주 오래됐지만 워낙 충격적인 영상이라 메꽃만 봐도, 마조히스트를 다룬 도발적이고 야수적인 심리영화가 자동 오버랩된다.  

동시에 뮤즈라 극찬받던 카트리느 드뇌브의 매력적인 금발과 완벽한 미모부터 떠오른다.  

극 중에서 상류층 부인으로 나오는 카트리느 드뇌브가 입은 의상마다 이브 생 로랑이 디자인했다는데 6-70년대 패션계를 풍미했던 낯익은 스타일에 대한 향수 같은 게 얼핏 스친다.   

프롤로그부터 지극히 몽환적이면서 너무도 무자비해 비릿한 날 것이 주는 낯선 이질감이 충격으로 다가왔으며 세브린느의 외설적 일탈 행위는 당시로는 납득 불가였다.

변태적인 에로틱한 화면은 현실 공간인가, 환상의 세계인가 도대체 모호했다.

이 영화는 감독의 작가주의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쉘부르의 우산, 사랑할 때와 이별할 때, 에서 본 조각같이 아름답고 우아한 여배우의 포르노그래피나 내심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프레드 히치콕이 매우 존경했다는 감독 루이 브뉴엘 (1900~83년)은 초현실주의 예술가이자 전위영화의 맥을 고수하며 문제작만을 발표해 온 터.

무의식의 심연 속 꿈, 기억, 몽상, 욕망 등 상징적 심리묘사에 탁월한 영상물을 주로 내놓았다.

칸영화제 그랑프리,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아카데미상을 거머쥔 대가인 그.

마드리드 대학을 나온 그는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함께 이미 스물여덟에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스페인에서 태어나 프랑스, 멕시코 등지를 돌아다닌 감독은 작가주의 필름만을 고수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원제 Belle De Jour는 프랑스어로 메꽃, 1967년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받은 작품이며 70년도 초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으로 한국에서 개봉될 땐 세브린느라 했다.

낮에만 피는 꽃이란 제목의 이 영화는 감독 루이스 부뉴엘의 후기 작품이고 카트리느 드뇌브가 연기했다.

프랑스 작가 죠셉 케셀이 1929년에 발표한 장편소설로 30년도 더 지나 루이스 부뉴엘이 영화화했다.

영어도 프랑스어도 스페인어도 맹탕이지만 영상미만으로 100분이 스르륵 흘러가는 영화다.

그 시대로는 심히 비도덕적이고 가히 획기적인 주제였겠으나 나이 들어 이제 다시 보니 뭐 그저 그렇다.

처음 봤을 당시의 순수성이, 그간 세월의 때 오지게도 타버려 꽤나 오염되고 손상됐나 보다.

https://youtu.be/vXhSpgG3eGE?si=6XJ08Z81ayPDLi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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