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탓만은 아닐 것이다.
미래를 계획하는 일보다 과거를 회상하는 일이 훨씬 많아진 요즘이다.
나이가 있으니 이는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삶의 양태일 터다.
흘러가버린 것들을 반추해 본다는 것은 그 과정 자체만으로 의미롭고 가치가 있다.
과거를 돌아보는 시간이 늘어난 덕에 느긋이 뒤로 좀 물러나 여유로이 삶을 관조할 수 있어서도 좋다.
특히 자신의 본질을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 줌으로 현재의 삶에 깊이를 더해 주게 되니까.
과거로 자꾸만 회귀하다보면 행여 퇴행이 아닌가 염려되기도 하겠지만 돈워리!
철들어 무거워지기 보다는 지금 이대로 가벼이 무조건 가뿐하고 헐겁게 살기.
이즈음 삶의 모토를 아무튼 재미지게 살고지고~에 두었으므로.
진지함, 엄숙함, 신중함은 더러 가끔 고명으로나 쓰기로 하고.
퇴행마저 즐겨, 내 기억회로가 이끄는 대로 유년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그 무렵의 추억들을 건져 올리곤 한다.
그렇게 무명실에 매단 북어 부적을 현관에 걸어놓았고 여름이면 연례행사처럼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였다.
나 어릴 적, 토속적인 전통신앙이 널리 성행하던 50년대다.
정월초하룻날이면 댓가지로 엮은 복조리를 안방문 위에 걸어놓고 조리 안에 성냥통과 엿가래를 넣어두었다.
가정에 달달한 일만 생기고 집안이 불처럼 화끈하게 일어나라는 뜻을 담아 성냥과 엿이 동원됐지 싶다.
조리는 쌀을 씻어서 이는 도구로 지금은 도정기술의 발달로 잔 돌 같은 이물질을 석발기가 가려내기에 조리가 필요 없는 시대이지만.
현관에 달아놓은 작고 귀여운 액막이 북어.
민간의 일반 풍습에서 북어는 천지신명에게 바치는 신성한 제물, 이는 좋은 기운을 불러들이고 나쁜 기운은 막아준다고 하여 관혼상제나 고사를 지낼 때 반드시 썼다.
항상 눈을 뜨고 있어서 집을 지키는 수호신의 의미에 더해 머리가 크고 알이 많아 성공과 풍요, 다산을 상징한다는 북어다.
이처럼 북어는 악귀를 쫓고 액운을 막아준다는 주술적 의미가 있기에 제사상에도 올랐다.
고사를 지낸 뒤에는 북어를 타래실에 묶어서 대문 위에 매달아 놓으므로 일종의 액막이 겸 액받이의 상징물로 삼았다.
여기서 무명 실타래는 아기 돌날에도 쓰였듯 장수와 길운을 보장해 주는 의미로 사용됐다.
이처럼 숨은 뜻 그럴싸해서인지 아니면 사는 게 팍팍해서인지 요새는 젊은 세대조차 액막이 북어를 산다는데.
미신이라커니 전통문화라커니 설왕설래하기보다는 하나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보면 맞다.
제주에 온 뒤 갈옷 염색하는 과정을 보고는 무명천에 날염을 하기 위해 백반 한통을 샀다.
그 후 남은 백반을 이용해 봉숭아 물을 들이기 시작했다.
해마다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적마다 할머니 생각이 났다.
내동 시난고난 노환으로 누워지낸 할머니다.
여름날 아이들이 봉숭아물들이려 봉숭아꽃잎과 괭이밥 잎새를 따와서 콩콩 찧고 있으면 뒷방에서 할머니가 힘겹게 나오셨다.
머리칼 하얗게 센 노인네가 나도 들여다오, 그러시며 손을 내밀었다.
파리한 손목 여기저기 시커먼 저승꽃이 피어 있었다.
마른 낙엽같이 여윈 손등에 유독 도드라지던 푸른 혈맥.
민간신앙 차원의 해석은 붉은색이 벽사(辟邪)의 뜻이 있으므로 악귀로부터 몸을 보호하고자 들인다는 봉숭아물이다.
그런데 할머니는 저승길 밝히려면 봉숭아물을 들여야 한다면서 한사코 약지와 소지에 물을 들였다.
첫눈이 올 때까지 손톱에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이 있는 건 알지만 저승길이라?
애들처럼 곱게 손톱 장식하는 게 뭐해서 괜히 하시는 소린 줄 알았는데 맞는 말이었다.
봉숭아물 붉게 들이면 병마와 악귀를 쫓아내고 무사히 저승길 갈 수 있다고 여겨 그에 기대보는 마음자리.
할머니 돌아가실 적 보다 훨씬 더 나이 많아진 지금사 그 심사 애틋하게 다가온다.
나이 들어 늙어보니 노년기의 화두는 웰빙 그 이상인 웰다잉(well-dying)으로 귀결되지 않던가.
누구를 막론하고 Memento Mori!!!
예전 원기소라는 어린이 영양제 광고 카피는 '개구장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였듯 주책바가지라도 좋다, 심신 건강만 하다면야 다 용서가 되느니.
이 세상 소풍 마치는 그날까지 재미지게 잘 놀다 가겠다,를 이젠 삶의 모토로 삼았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라 알려졌지만 좌우명 비슷한 한마디,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란 후회는 하지 않도록 시간 낭비하지 말고 차지게 놀아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