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민선시장
오전엔 산책 삼아 자구리해안을 다녀오곤 한다.
길은 여러 갈래로 나있다.
거처에서 서귀포우체국을 지나 서귀포성당을 거쳐 자구리로 갈 적도 있다.
더러는 동문로터리에서 무조건 바다 쪽으로 쭉 내려가기도 한다.
혹은 올레시장으로 해서 이중섭거리를 통과해 솔동산에서 자구리로 간다.
오늘은 이중섭거리를 통해 바닷가로 내려갔다.
비교적 따스한 편인 서귀포라 여전히 가을이 머뭇거리는 가로에 단풍잎 낙엽되어 흩날리고 있다.
북에서 피난 내려온 중섭 가족이 일 년 남짓 몸 붙여 살던 초가집 앞에서다.
윤곽 둥그스름 부드러운 초가지붕 위로도 낙엽이 떨어지고 있었다.
봄 한철 그리도 소담스레 피었던 목련화, 큼다막한 이파리 메말라 길섶에 가벼이 내려앉았다.
괜히 마른 잎새 발끝으로 헤집다가 애꿎게시리 걷어차 버렸다.
이중섭미술관을 처음 만들 때 주무 행정처에서는 겨우 이십년 후 조차 제대로 내다 볼 혜안이 없었던가.
전시 공간, 수장고, 편의 시설, 창작 공간이 턱없이 부족해 협소한 전 미술관보다 새 미술관은 아홉 배나 규모를 늘린단다.
한국의 고질인 허장성세증이 도져 더 웅장하고 더 크게, 겉치레에 치중할 게 아니라 내실을 다지면서 점진적으로 시설을 확충하는 방식도 채택해봄직 하련만.
흔적없이 철거시킨 먼젓번 미술관이 아직도 눈에 삼삼, 안타까워서였다.
그 미술관도 괜찮았는데 새로이 건립되는 미술관은 2년 후에나 개관한다니 그동안 공사 가림벽에 이중섭공원까지 빙 둘러 감싸인 채라 과거의 운치 사라진 점도 아쉬워서였다.
저지난해 시월, 신문 기사는 오광협 전 서귀포시장의 부음을 전했다.
향년 90세로 이승에서의 소풍 마치고 소천하신 그분을
생전에 뵌 적은 없다.
다만 이중섭거리 조성을 처음 기획한 분이 궁금하던 차, 조사해 올라가다 만나게 된 존함이 오광협 서귀포 시장이었다.
1995년도에 초대 민선시장이셨으니 꽤 연로하시겠다 여겼을 뿐 만나 뵙고 인터뷰를 할 생각까지는 미처 못했다.
오광협 제9대 서귀포시장님은 시장으로 재직 시, 남다른 안목과 특별한 식견으로 이중섭거리 조성이라는 훌륭한 결과물을 서귀포에 남겨놓았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맞다.
그분은 제주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탐라대 대학원에서 관광경영학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인간은 모름지기 그래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한 분야의 능통한 이론가 이전 학문이 자연스레 그분에게 체화되었음이리라.
뭘 알아야 무모하게 생 땅 파헤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전쟁통에 피란 와 단지 11개월 머문 인연일 뿐인 한 화가.
월남 후 여러 지역을 정처 없이 떠돈 이중섭을 문화 콘텐츠화하여 지역 관광수입에 큰 보탬을 준 행정가였던 분이 오광협 시장이다.
오시장은 발 빠르게 이중섭의 서귀포에서의 11개월을 브랜드화시켜 그를 문화 아이콘으로 선점했으니 말이다.
덕택에 풍광 좋은 관광지이자 문화가 있는 관광지로 서귀포는 거듭날 수 있었다.
먼 미래를 내다보는 탁월한 혜안으로 고위 행정가들이 지속발전가능한 도시 개발 문제를 다각도로 연구하고 고민하며 시정을 이끌어나간다면 이처럼 시민들에게 귀한 선물을 남기는 일이 가능하련만.
특히 낙하산 타고 시장 자리에 앉은 분들은 오시장님의 모범사례를 벤치마킹할 의지라도 보여 적극 시정에 보탬이 될만한 이 같은 일을 찾아서 해냈더라면...
자구리해안가 잔디공원에 이르면 작은 무대와 조경수인 야자나무며 쉴 수 있는 편안한 벤치가 놓여있다.
철제 조각품인 화가의 손이며 청동과 돌로 만든 조각상도 서있다, 제목은 <실크로드 - 바람길>이다.
실크로드에선 낙타가 등짐을 지고 끝 모를 사막을 걸어가나 여기선 의외로 사슴 혹은 순록인가.
저마다의 짐을 짊어지고 묵묵히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형성화한 송 필의 조각작품이 심사 추연하게 만든다.
뿔만도 무거운데 태산을 등에 짊어진 사슴/순록의 다리는 너무나도 가녀리다.
볼 적마다 묵상 거리를 던져주는 이 조각은 동시에 슬몃 고개 주억거리게 만들곤 한다.
그래~부처님도 예수님도 왜 삶은 고해라 했으랴.
저마다 등짝에 지워진 숙명 같은 짐을 지고 한세상 살아가기는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엎어질 듯 무거운 등짐에 짓눌린 곤고한 인생길에서 삶의 짐 잠시 부려놓고 먼 수평선 무연히 바라보고자
자구리 해변으로 내려갔다.
썰물 때라 물이 빠지고 있었다.
무수히 드러난 검은 바위 위에는 역시 새카만 가마우지들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파도 없는 바다라 섶섬은 고요했다.
구름이 많아 해가 가려지니 윤슬은 잠시 반짝대다가 슬그머니 사라졌다.
한동안 정신줄 느슨히 풀어놓고 바다멍에 빠져들었다.
돌아오는 길. 서귀진성이 있는 언덕 쪽으로 올라왔다.
근처 주택가 안마당 감나무에서 맛나게 감을 쪼아 먹는 박새를 한참 바라보았다.(단풍잎 스티커 위쪽)
여유작작, 발길 무진 한유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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