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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2. 2024

연금술사가 사랑한 괴이쩍은 마을

카미노 스토리

카스트로헤이즈(Castrojeriz)에 가기로 한 것은 귀가 얇은 탓이었다. 여행자 리뷰에 솔깃했던 도반이 오래간만에 한식을 먹어보자고 했다. 한인이 운영한다는 알베르게의 저녁 메뉴가 비빔밥이니 거기서 하룻밤 묵자기에 동의했던 것. 캘리포니아 사막지대를 방불케 하는 황막 강산에 펼쳐진 외딴 마을은 버려진 듯 쇠락한 채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동네 어귀에 들어서기 전부터 별로였던 마을 인상인데, 오랜만에 먹는 비빔밥의 얄궂은 맛에 더한층 정나미가 떨어졌다. 스페인 친구들이 자신 있게 권하는 돼지 넓적다리 절여서 숙성시킨 '하몽'도 짠지보다 더 짜기만 해 고개 흔든 못난 식성 때문인가. 젊은 여성 풋솜씨라서 인지 여하튼 비벼놓은 밥 남겨놓기도 처음이다.



먼지 풀풀 날리는 신작로에 어쩌다 하나 지나갈까 말까 한 버스가 전부인 궁벽진 오지. 교통 편만 허락한다면 다른 마을로 이동하련만 도리 없이 하루 유할 수밖에 없었다. 저녁을 먹고도 해는 여전 한낮이라 동네 뒤편 성으로 올라갔다. 옛날 옛적 이슬람 정복 기간에 무어족과의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는 요새 마을다웠다. 그보다 훨씬 전인 로마시대에 금 운송로를 지킬 목적으로 그때 이미 굳건하게 기초를 닦았다는 성터, 허물어진 중세 고성이 언덕 꼭대기에서 우릴 향해 손짓했다.



산길에는 마치 터키 동굴집같이 지하의 자연동굴을 이용해 만든 독특한 구조의 가옥들이 늘어서 있었다, 겉보기엔 일반 흙 같은데 토질이 매우 굳은 특수지형인 모양. 입구만 집 형태를 갖춰 지붕이 덮여있고 저만치 굴뚝이 꽂힌 매우 허름한 산동네였다. 허락을 받고 잠깐 들여다보니 내부는 땅굴을 넓혀 방과 부엌, 와인 저장실까지 만들어놨다. 그 비좁은 집에서 아내와 함께 폴카 비슷한 춤도 췄다. 유쾌 발랄한 쥔장은 신이 나 와인통을 들고 나와서 우리에게 한잔씩 대접했다. 오후 햇살에 비친 실내는 남포불과 화덕 그을음으로 거무스름했다. 그러나 흙벽 거친 대로 아치형 칸막이도 요리조리 만들어 나름 멋을 부려놨다. 하긴 아득한 구석기 때 이미 동굴 안에 벽화를 남긴 스페인 사람들 아닌가.



LA 근교 우리 동네 산이듯 푸르른 나무 대신 볼품없는 잡초만 나부대는 산길. 정상에 오르자 중심 잡기 버거울 지경으로 사방에서 세찬 바람이 거침없이 불어 젖혔다. 높은 데라 발치에 깔려있는 마을 정경과 실처럼 나있는 들판길은 물론 저 멀리 풍차가 서있는 산마루 풍경까지 조망권 제법 근사했다. 그러나 10세기 무렵 카스틸(Castille) 왕국이 무역의 중심지로 삼아 성을 쌓아 올려 4백여 년간이나 번창했다는 옛 영화의 자취는 간 곳이 없었다. 형체 가늠조차 어렵게 겨우 윤곽만 잡히는 고성. 광야를 떠돌아다니는 메마른 바람결 따라 흩어져 갔는가. 한여름 강렬하게 불타는 태양에 녹아버렸는가. 아니면 무심히 겹쳐진 일월의 무게에 항복했던가. 견고한 석성은 반 너머 무너지고 성 안의 건물들은 죄다 사라진 채 유적지 안내문만 과거를 장황스레 설명해 주었다.

카스트로헤이즈 마을 방문은 순전히 비빔밥 때문이라기보다 파울루 코엘류가 작품 소재의 영감을 받았다던 곳이라 구미가 당겼었다. 왠지 특별한 무언가가 비밀스럽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환상에 가까운 초자연적 현상이나 무한 자유로운 몽상의 세계 같은. 아무튼 코엘류가 프랑스 순례길에서 만난 마을 중 가장 아름답다고 격찬한 이곳. 도무지 어느 점에 혹해 그는 카스트로헤이즈에 매료됐던 걸까. 쉽게 의문이 풀리지 않아 마을로 내려와 골목골목 순례를 했다.


전설 한 자락 풀어낼 듯 청승맞게 감도는 적막감이 어느 순간, 골방 냄새가 아니라 잘 숙성된 발효주에서 풍기는 향으로 다가왔다. 나이테 겹겹으로 덧쌓여야만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되 욕심 과하지 않은 맑은 영혼만이 지닌 품격미랄까. 한순간에 동네 사람들이 다 증발해 버리고 화석화된 듯 괴괴하던 첫 느낌. 그것과는 달리 골목길을 돌아다녀 보니 묘하게 끌리는 신비로움 깃든 곳이 카스트로헤이즈였다.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찬연하게 물든 산타 마리아 델 만사노 성당(Colegiata de Santa Maria del Manzano)에 들어갔다. 성 야고보가 사과나무에서 성모상을 보았다는 곳이다. 미사를 막 마친 시각이라 문이 열려있었기 망정이지 아니면 곧 굳게 잠길 문이라 구경은 어림없을 뻔했다. 13세기 때 돌로 만든 채색 성모상 등 문화재를 소장한 데다 많은 조각과 회화 작품이 매물로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연금술사'에서 양치기 산티아고는 꿈을 좇아 사막 건너 멀리로 보물을 찾으러 나섰다가 결국 원 자리로 돌아와 교회 안에서 보물을 얻는다. '파랑새' 동화가 그러하듯이. 또한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시크릿'도 최면을 걸었다. 헌데 그 숱한 기원에도 불구하고 교회 재정이 영 시원치 않은가? 흐린 조명 아래 한 시절 예배 대상이었던 성물들이 민망스럽게 가격표를 내걸고 나앉았다. 벼룩시장이나 난전에 펼쳐놓은 허접한 골동품 신세처럼 차량 맞게도. 한때 세계 곳곳에 숱한 식민지를 거느렸던 해양강국 스페인의 현주소, 종이호랑이를 보는 것 같아 심사 미묘해졌다.

 

강아지풀이 아직 이슬에 젖어있는 동틀 무렵 카스트로헤이즈를 떠났다. 본격적인 메세타 지역에 들어섰으니 당분간 막막하도록 지루한 길을 걸어야 한다. 그늘 한점 없는 빤한 행길 가득 하얗게 쏟아지는 햇살 데불고서. 지구가 둥글다는 걸 실감 나게 했던 어렴풋 곡선 이룬 먼 지평선. 대평원의 밀밭이 가도 가도 끝 모르게 이어질 것이고 황무지의 돌너덜길이 야트막한 구릉과 번갈아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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