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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12. 2024

등꽃 피면 멸치회 철-갯비린내 짙게 밴 기장 대변항

부산 구석구석

수십 년도 더 전의 어느 해 봄날. 엄마가 기차를 타고 부산에 오셨다. 며칠 지내시다 곧 서울 올라갈 날짜가 가까워졌다.

공직에 있는 언니 대신 살림살이 윤나게 거두셨기에 오래 집을 비울 수 없었던 엄마.

우리 집에 오셔도 그저 냄비 광나도록 닦아놓거나 고추장 같은 거 담느라 시종 바삐 종종걸음질이다.

구경 좋아하는 양반인데 부산에 머무는 동안 태종대로 어디로 좀 모시고 다녔으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비교적 건강체이셨으나 팔순이 가까워지며 척추협착증으로 걷기 힘들어는 하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는 성정도 아니라서 손녀 데리고 뒷산 언저리 곧잘 오르곤 했다.

부산 인근 범어사도 가볼 만하고 양산 통도사도 하루 일정으로 충분히 다녀올만한 곳인데 왜 안 갔을꼬.

우리 애들이 미션 구경 가자거나 경주 나들이 가자 할 적마다 슬그머니 고개 쳐드는 회한에 그만 싸해지곤 하던 마음.

 


그 봄 화창한 일요일, 서울로 가시기 전에 동해 바람도 쐬고 멸치회 드시자며 웬일로 무뚝뚝한 경상도 사위가 앞장을 섰다.

기실 마뜩치는 않았던 것이 엄마나 나나 회 종류를 못 먹는 식성, 바다낚시로 잡아온 볼락회도 여태 입에 넣어본 적 없던 터.

회 대신 오징어나 소라를 데쳐 숙회로 먹어도 되니 일단은 시원한 바다도 볼 겸 우리는 차에 올라 달맞이고개 넘어 내처 달렸다.

기장 대변항에 이르니 비린내 풍겨대는 해변가는 젓갈 사려는 이들로 북적거렸고 식당마다 손님들로 성시를 이뤘다.

한창 제철 대목인데 우리는 용케도 등꽃 시렁이 얹힌 명당자리 차지하고 난생처음 멸치회라는 걸 접하게 되었다.

생각 같아선 비리기만 하고 살도 무른 멸치로 무슨 회? 싶은 게 보나 마나 식감 물컹하고 비릿하리라 지레짐작했다.

그런데, 맛깔스레 미나리 들깻잎 부추 넣어 벌겋게 무쳐내 온 푸짐한 접시를 보자 슬그머니 식욕이 동했다.

한번 드셔 보이소, 내키지 않으면 오징어 데쳐달라카지요, 엄마에게 상추에 싼 회를 권하자 받아 자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야, 어여 너도 먹어봐~ 고갯짓과 눈빛으로 보낸 맛이 괜찮다는 신호였다.

괜히 깨작거릴 바엔 아예 손도 대지 말고 나무젓가락도 꺼내지 말자, 했는데 어느새 깻잎에 올려진 회가 넝큼 입에 들어갔다.

안 먹는다던 내가 그날 아마도 제일 많이 멸치회를 먹었지 싶은데 물론 엄마도 아주 맛있게 잡쉈다는 말씀 두고두고 하셨다.

등꽃이 피면 해마다 그 생각이 떠오르며 한국에 가 철이 닿으면 다시 멸치회를 먹어봐야지 별렀다.

역시 특별히 여기는 음식 맛은 추억 속 기억에 새겨진 맛이고 향수 어린 맛을 최고로 치는 거 아닐까.

작년에도 올해도 멸치회 철이 되자 틀림없이 바닷가 멸치회 전문 식당을 찾고야 말았다.

올해는 벼르던 대로 대변항에 들러 예전 등꽃 시렁이 있던 식당을 찾아보기로 했다.

어림짐작으로 골목길 이리저리 두리번거려도 보고 물어도 봤으나 그 집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발품만 실컷 팔다 하는 수없이 초등학교 옆에 있는 남항 횟집에서 멸치회를 맛봤다.

우선 바다가 내다보이는 식당 깔끔한 데다 음식도 밑반찬까지 두루 맛깔스럽고 정갈했다.

그 무엇보다 오래전 엄마와 처음 먹었던 그 멸치회의 맛, 기억회로에 새겨진 그리운 맛을 재현해 준 것이 기껍고 고마웠다.

언제든 물회가 먹고자프면 서슴없이 다시 찾을 그 집.


금강산도 식후경이랬다.


봄멸치가 제철을 맞았으니  고깃배 들어오는 항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유명 멸치 산지는 한려수도를 낀 남해, 통영, 완도 등으로 남쪽 바다에 몰려있다.

그러나 청정수역인 동해에서도 멸치가 대거  잡힌다.

부산 인근 기장 대변항은 잘 알려진 멸치 산지다.

더구나 전국 유자망 멸치 어획고의 60%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국내 최대의 산지다.

대변항에 이르자 온 데서 비린내가 진동한다.

때마침 만선 이룬 배들이 속속 입항해 그물을 털고 있었다.

와우~ 귀한 구경거리 만났으니 이게 바로 심봤다 아닐손가.

대박~호기심 천국, 경사 났네~ 경사 났어!!!

처음 보는 광경, 그물을 털 때마다 사방으로 멸치가 날아오른다.

물론 성미 급한 멸치는 이미 다한 명, 그물에 낀 대가리 빼보려 요동질치다가 제풀에 지쳐 가버린 것.

죽음조차 시시하다고 증언하는/하얀 천사들의 청징한 눈빛들, 이라고 읊은 시인의 표현대로 열반한 멸치 표정은 참 고요해 맑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야라 차이야, 어야라 차이야' 소리에 맞춰 앞소리와 뒷소리가 엇물리며 흥겹게 그물을 털었다는데.

요즘사 멸치잡이 노래인 멸치 후리기나 멸치 털이 같은 공동 노동요는 사라졌지만 그래도 구경꾼은 마냥 신났다.

작업 중인 외국인 노동자는 무표정하게 로봇처럼 그물 한끝을 부여잡고 어깨 빠져라 그물 털어야 하는 고되고 힘든 작업일 따름이지만.

멸치 터는 작업을 처음 설핏 보고는 그물을 디립다 털기만 하면 멸치가 산지사방으로 흩어지는데 우짜꼬 싶기도 하며 의아스러웠다.

한참을 지켜봐도 도무지 멸치는 어디로 가는지, 어떻게 모아서 경매장에 내놓게 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멀찍이 물러나 있는 선주에게 물어보니 배와 부두 사이 바다에 그물을 길게 드리워놓았는데 거기가 바로 멸치 집하장인 셈이라고.

멸치털이가 끝나면 그물을 모두어 중장비로 건져 올린 다음 옆에 있는 위탁 판매장에다 즉석 공매를 붙인다 하였다.

생멸치를 대량으로 사들인 중매상은 지체 없이 멸치와 천일염 버무려 젓을 담아 저장해 두고 나머지는 생으로 판매한다는 것.



멸치는 다시용 마른 멸치 외에 젓갈용으로 대량 소비되나 이곳에서만 맛볼 수 있는 멸치무침회, 멸치구이는 아주 특별난 별미다.   

산란기에 가까워지며 통통하게 살이 오른 왕멸치는 지방질이 풍부해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비린내? NO!! 매콤새콤하게 회 무침이나 튀김을 하거나 석쇠에 얹어 숯불구이한 그 맛에는 미식가들도 단박 반해버린다.

최근, 멸치젓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미생물이 동맥경화 억제효과를 보인다는 연구결과가 발표되며 멸치젓의 가치를 더 높여주었다.

지금은 멸치가 연안 가까운 내륙만으로 들어오는 봄 멸치 철, 가을이면 제주도 멀리로 멸치가 이동하는데 이때도 잠깐 멸치철이 된다.

옷에 짙게 밴 멸치 냄새, 어장에서 멸치털이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으니 비린내 범벅이 됨은 당연지사다.

부산 와서 다시 멸치회 포식하고 멸치털이 구경까지 잘했으니 오늘도 선물 같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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