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도심도 은세계

by 무량화

1100로, 516로, 서성로, 1 산록도로 대소형통제/번영로, 평화로, 남조로, 비자림로, 2 산록도로, 명림로, 첨단로, 애조로, 연북로 소형체인/경찰청도로통제확인 바랍니다 [제주도]


오늘 06:40 제주(제주남부) 대설주의보. 내 집 앞 눈 치우기에 동참 협조, 출퇴근 시 차량 운행은 자제하고 대중교통 이용. [행정안전부]


새벽부터 연신 안전 안내문자가 떴다.


창밖 무채색 허공 가득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솜덩이를 잘게 뜯어 공중에서 날리 듯 하얀 눈송이가 성성하게 나부꼈다.


가볍디가벼운 눈은 바람을 타고 허공에서 어지러이 춤을 춰댔다.


이때 하필이면 왜, 전쟁통에 남으로 온 실향민도 아니면서 아침부터 구슬픈 노래가 떠올랐던지.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 가락에 실린 '굳세어라 금순아'라도 흥얼댈 판이다.


천지간이 눈에 싸인 아름다운 아침에 이 무슨 청승?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도시는 온통 새하얗게 눈에 덮여 있었다.


앞바다는 자취 아득해졌으며 하계에 깔린 빌딩 옥상마다 은세계를 이룬 채라 도회가 문득 낯설어 보였다.


아, 이런 때는 동구 밖 풍경 지워진 마을에 둥그스름 원만한 초가지붕이 엎드려 있어야 제격일진대.


현관문을 열자 북창에 부딪히는 눈발 사이로 성탄트리가 선 중앙로터리만 보일뿐 한라산은 뿌연 눈보라에 숨어버렸다.


순간, 로터리 인근 가로변에 조경용으로 심은 초화류들, 이 눈 속에 팬지며 금어초가 어찌 지내는지 궁금해졌다.


따스하게 모자에 옷 챙겨 입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도로는 녹은 눈이 물 되어 범벅이 된 데다 그 위로 거듭 눈 겹쌓여 미끄러이 얼었다.


로터리 쪽으로 살금살금 최대한 조심하며 걸어갔다.


팬지꽃이 눈이불을 폭신 덮고 있었으나 더러는 장난꾸러기 막내처럼 고개를 반짝 치켜든 꽃송이도 있었다.


얘네들은 틀림없이 이 폭설 무게 너끈이 이겨내고 되살아날 것이다.


더러 냉해를 입는 아이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땅기운에 힘입어 방긋 웃으며 일어나리라.



전에 캘리포니아에서 텃밭을 가꿔봐서 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뒤뜰 잔디에 된서리가 보얗게 내렸고 수돗가 대야에 받아둔 물이 꽝꽝 얼어버렸다.


연한 싹들 모두 꼼짝없이 데친 듯 동해를 입었겠구나 싶어 얼른 텃밭으로 쫓아나갔다.


세상에나, 고 어린것들은 하얗게 눈서리를 덮어쓴 채로 잎이 얼어버렸으나 아무렇지도 않게 꼿꼿하니 태연했다.


신기하고 신통스러웠다.


여리디 여린 어린순들이 감내하기 어려운 영하의 냉혹한 조건을 어찌 참아내고 견뎌냈을꼬.


지금도 그들 모두를 버티게 한 힘의 정체가 무엇이었는지를 모르겠다.


자체 에너지? 땅의 온기? 자연의 신비다.


만일 사람을 그 밤에 한 데서 그것도 입성 허술한 채 놔둔다면 동사하고 말 터.


큰 나무 같으면 그러려니 하지만 연약한 식물이 강하기도 하지, 아니 장하고 독하기도 하지.


연말에는 구름장이 험한 얼굴로 하늘 장악하더니 그 밤 눈 폭풍이 온다고 일기예보는 전했다.


영하의 날씨야 버텨냈다지만 눈 속에 갇히게 되면 잎이 상할 테니 미리 대비를 해야 했다.


멍멍이 패드를 죄다 꺼내 시금치를 제외한 나머지 이랑마다 덮고 네 귀는 정원의 돌을 골라서 누질러 두었다.


생태계의 모든 생물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나름의 방식으로 투쟁하기 마련이런가.


헌데 식물은 그 점 동물에 비해 태생적으로 조건과 구조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다.


애초 정해진 자리에서 위치나 자세 조금치도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동토의 땅, 혹한의 시베리아 벌판에서 초목들 살아가기도 힘겹겠지만 건조한 열사의 땅 역시 고통스럽긴 매일반.


사막에서 식물이란 이름으로 살아내기 역시 버겁기는 마찬가지다.


불볕 아래 습도는 제로, 복사열로 숨길 헉헉대게 만드는 아스팔트 도로나 시멘트 마당은 하도 뜨거워 맨발로 잠시도 서있을 수 없다.


직사광선을 피할 수 없는 폭염 속에 서있으라면, 보통은 단 오 분도 버티기 어려울 정도다.


그 속에서 여린 식물이 견뎌내는 걸 보면 굳세고 강한 의지가 장하기도 하지만 한편 억세게 모진 성정 독하기도 하지 싶다.


하지만 창조주는 이 세상 그 무엇 하나에도 역시 소홀함이 없으셨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 못지않게 생명체마다 공평하게 나름의 경이로운 생존법을 하늘은 선물해 주셨으니까.


신께서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 모든 목적을 이루어가는 오묘한 작용, 섭리 덕분이다.



0도를 가리키는 수은주.


강한 바람을 동반한 폭설이 내린다더니 아니나 다를까 예보대로 눈보라가 심상치 않은 기세로 몰려온다.


산간엔 거친 바람과 함께 눈발 밤새도록 퍼부었다는데 오늘도 진종일 흐렸다 개였다 요망 부리며 눈발 흩뿌려댔다.


제주 날씨 변화무쌍하다고는 하지만, 어제와 오늘 하루 내내 시시각각 변하는 기상도야말로 예측불허다.


좀 전까지 파란 하늘에 해가 반짝 비쳤는데 지금은 다시 휘몰아치는 눈보라.


문섬 띄운 서귀포 앞바다에 은물결 일었는데 현재 시계는 제로, 원경은 다 사라지고 바로 앞 건물 위로 쌓인 눈 하얗다.


이 기상상태라면 한라산 설경 더할 나위 없이 최고로 잘 숙성 발효시켰겠다.


초이틀날은 궂은 날씨 덕에 방콕 모드로 아주 느긋하게 하루 편히 잘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