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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24. 2024

조폐공사가 창립된 장소

동래 명륜동 지하철역에서 메가마트 길을 지나가다 특이한 모형의 벤치를 보았다.

처음엔 단단히 오해를 했다.

마트에서 돈 척척 풀어쓰라며 화폐와 돈다발을 형상화시켜 이런 구조물을 설치해 놨나 싶어서였다.

너무 속 보이는 천박한 상술이군, 흥~코웃음치고는 오백 원 권 밟으며 쓱 지나쳤다.

어쩐지 누런 금니 드러낸 왕서방처럼 얄팍한 천민자본주의를 보는 듯해 영 느끼하니 속물적으로 여겨졌다.

다리품 팔며 마트에서 쇼핑한 후라서 나무그늘에 앉아 쉬면서 물이라도 마시면 미상불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하지만 골목길 수선스럽고 너저분해 벤치에 앉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그 길을 걸어가다가 한참만에야 비로소 까만 오석의 기념비를 발견하게 됐다.

엽전을 쓰다가 일제에 한동안 예속돼 식민지 백성으로 살았으며 겨우 맞은 해방, 그리고 한국동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한국 근세사다.

동란의 와중인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 조폐공사가 창립된 자리이니 대한민국의 첫 화폐가 태어난 발상지이며 초석을 놓은 다.

당시 아무 준비 없이 전쟁 치르며 경제는 파탄 나고 군비 지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화폐수요 충당을 위한 은행권 제조가 시급했다.

서울에 있는 조선은행의 제조 시설을 옮겨올 상황도 아닌 급작스러운 전시, 국책사업을 수행하는 공기업의 일조차 더없이 취약한 여건이었으리라.

그 혼돈기에 제반 시설은 얼마나 열악했을 것이며 기술력인들 변변했을까.

이태 남짓 어설프게나마 우리 돈을 찍어내는 조폐공사로서의 위상 반듯하게 세우고자 초창기 멤버들 특히 고생이 많았을 게다.

명륜동 506번지, 개인사업가의 크레용 공장을 빌려 조폐공사라는 특수법인체를 설립했다.

어렵게 찍어낸 천 원권에는 전면에 이승만 대통령 초상이 들어갔고 후면에는 탑골공원 도안을 자색과 녹색으로 꾸며넣었다.

오백 원권은 비슷한 도안에 문자 크기나 색상이 달랐으며 백 원권은 광화문 도안이 들어갔고 제조 연도는 단군 원년을 사용했다.

어릴 때 학교 월사금을 내던 돈이었을 텐데  돈보다 조선은행권이라는 백 원짜리 수염 덥수룩한 할배가 그려진 예전 돈만 기억되는지(하단).

대한제국 이후 반세기 만에 현대식 화폐라는 걸 처음으로 찍어낸 자리이니 감회 유다른지라 역사적 상징성에 따라 당연 기릴만한 장소.

국내 최초로 현대 화폐 천 원권과 오백 원권을 제조한 한국 조폐공사 옛터.


이를 기념하는 의미로 돈 조형물과 분수와 벤치를 제작했노라 건립 취지문에 적혀있다.

지금의 조폐공사는 돈만 만드는 게 아니라 초정밀 기술력으로 훈장, 메달, 우표, 골드바, 국채, 주민등록증 등을 제조하는 공기업으로 발전하였다.

현 한국조폐공사(KOMSCO)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과학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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