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청탁 받은 글을 쓰지 못한 적이 한차례 있다.
다작 체질인 나로선 의외의 일로 마감 기일이 지나도록 기어이 원고를 못 쓰고 말았다.
90년대 Y 문화사에서 기획물로 출판할 예정이었던 책의 주제는 '나의 아버지'였다.
벌목사업을 하던 아버지는 천상 한량으로 줄줄이 첩실을 거느렸으니 엄마는 평생 시앗을 달고 살아야 했다.
딸만 겨우 둘을 둔 동생을 보며 작은이모가 '쯧쯧~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하던 말뜻을 그땐 몰랐다.
그 이모가 첫 번째 책을 묶어낸 내게 이런 말을 하셨다.
"예전에 느이 엄마한테 약혼자가 만리장성으로 써보낸 편지는 동네에서도 아주 인기가 있었단다.
소설책 돌려 보듯 처자들이 뺏어가며 읽을 정도로 느이 아버지 글솜씨는 대단했더니라."
다행히 남자가 아니라서 아버지의 바람기만은 물려받지 않았다.
감정은 인간 실존의 핵이다.
엄마도 여자인데 투기심이 전혀 없을 리 없고 엄마라고 속이 상하지 않을 리 없었으련만
한번도 집안에서 큰소리 나도록 다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묵묵히 인내하며 모든 고통을 속으로만 삭힌 엄마.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법, 한쪽에서 말 없는 돌부처같이 지내니 시끄러운 불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엄마가 자주 위경련으로 고통받던 것은 지독한 스트레스 때문이었음을.
해서 나는 일방적으로 희생, 순종만 하며 무조건 참고 견디는 역할에 강한 거부감을 갖게 됐다.
이는 순전히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니 속내와 다른 어거지 글을 어찌 쓰겠는가.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 잔뜩 남겨진 터에 콩트 쓰듯 꾸며서 아버지께 헌사를 바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제는 아버지의 성향을 이해까지는 아니어도 수용은 할 만큼 나이 들었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결기가 자못 꼿꼿하고도 시퍼랬었다.
얼마전 오랜만에 만난 이종사촌이 뒤란에 심은 호박 모종을 보고는 "너도 호박지 좋아하냐?미국에서 오이도 아닌 호박을 다 심게?" 물었다.
호박잎 쌈도 좋아하고 애호박 넣고 끓인 된장찌개도 좋아하고 겨울엔 호박지도 잘 담는다고 했다.
이모부 식성 닮았구나. 겨울에 이모집에 가면 식사때마다 화롯불 위에서 호박지가 보글거렸어. 이모부가 특히 좋아하시는 반찬이라고 하더니만......
그건 내력이구나, 나를 비롯 우리집 아이들까지 호박지를 잘 먹는다.
우리만이 아니라 언니네 애들도 겨울이면 즐기는 찬이 호박지다.
유전자의.정직함이라니, 순간 가슴이 뭉클 따스해진 적이 있다.
하지만 난 여전히 아버지와 화해를 하지 못했다.
돌아가신지 몇 십년이 지났음에도.
그처럼 아버지와의 관계가 원만치 못했던 나인지라 남편이 고스란히 덤터기를 쓰고는 걸핏하면 티격태격거렸다.
그 와중에서 그나마 반듯하게 자라준 아이들이 고맙고 또 미안하다.
엄마는 한번도 스스로를 챙기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식들 힘겹지 않게 하려 끝없이 인종했더랬는데
도대체 나는 자녀들을 위해 자신을 얼마나 깎아냈으며 낮추었던가.
가정의 평화를 지키고자 얼마만큼이나 참아내고 삭혀냈던가.
엄마의 백분의 일 정도라도 닮는 건 고사하고 비슷한 흉내라도 내봤던가.
내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한번쯤은 귀감 삼고 싶을만한 바람직스러운 점이 과연 내게 있기나 한가.
하많은 단어 중 가장 푸근하고 안온하고 따스한 말인 엄마, 거기 어느 정도나 부합될만한 나였던가.
훗날 아이들이 나를 추억할 때 내가 엄마를 생각하며 애틋해 하듯
가슴에 뜨거움이 고여오는 그 무엇이 있을까 모르겠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통해 부족한 오늘의 내 모습을 반추해보니 뒤돌아 자신이 민망스럽기만 하다.
Summer(underthesun) 68.xx.xx.235 | 03/31/2015 00:56
어머...,
아드님이 외할아버지를 ....
그리고, 손자가 외증조부를 꼬옥 닮으셨네요...., 놀라워라~~!
엄마의 외모를 안닮으셨으니 비슷한 흉내도 내지 않으신듯....,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많이 겪으셔서
이럴땐 좀 차이를 느껴요?
무슨 차이? 아심씨롱~
촌장(kubell) 104.xx.xx.13 | 03/31/2015 01:15 |
낮에... 괜히 잠 설치게 해 뿐네요 ㅎ
그려서 아직도 잠이 올락말락~
헌디 거긴 워쩐일이다요?
외할방
흠흠~ 그 점 신기하기 짝이 없어라
외탁을 한 거까진 좋으나 고얀 DNA까진 닮아선 절대루다 안되야 !!
토마토*향기(BusinessCoach) 72.xx.xx.75 | 03/31/2015 02:22
무신 말씀이신지??
촌장님같은분 나와보라카이
살으신 시대가 달라서 그렇지...
부모님을 그리는 촌장님 맴이 그대로 보입니다.
촌장(kubell) 104.xx.xx.13 | 03/31/2015 09:42 |
아침에 들어와보니 와 이리 남사스럽노
이자 야밤 블로깅 놀이, 그만 끊어야겠어유
햇살 환하고 생각 멀쩡한 한낮에야
이런 글 따위 올릴 리가 없거든유
에공~ 또 제탓 대신 엄한 거 탓이나 하고 ㅉㅉㅉ....
백곰(490316) 107.xx.xx.55 | 03/31/2015 05:13
늦게라도 뉘우치니 마음은 후련하시려나..
이조시대 아니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한반도의
폐습이 6.25전후까지 내려 온 듯..
숱가락 제바로 든 남정내치고 소실 안 둔 인간들이
드물었던 시대...한양은 기생집이라도 있었지만
지방은 소실 한둘쯤은 대수였던 모양...
촌장(kubell) 104.xx.xx.13 | 03/31/2015 09:50 |
오랜만에 들어보네요 ㅎㅎ숟가락 제바로 든...
그렇지요, 당시 밥술이나 먹는 집구석치고
첩실 거느리지 않은 남정네가 없었거든요
어떤 종파의 주장처럼 일부다처제 포장하길
과부나 고아를 거두려는 자비지심이었는지
암튼 그 당시는 먹이고 재워줄 여력만 있어도 식모 부리고 살던 시절
백곰님이 사신 한양만 기생집이 있는 게 아니라
당진에도 신선각 등 요정이 있었답니다 ㅎ
판도라(pandorabox) 107.xx.xx.194 | 03/31/2015 05:56
두분 다 인물이 참 좋으십니다. 베리굿.
근데... 아무렴 헤밍웨이 보다는...
Do you know how many wives and girlfriends Hemingway had in his whole life? Guess how many... Or compare to Zorba the Greek :)
(계속 머리에 쥐나시게 ㅋㅋ)
촌장(kubell) 104.xx.xx.13 | 03/31/2015 09:51 |
ㅎㅎ 머리에 쥐부터 내려야겠습니다
베리굿 인물 사진 제깍 덮어씌우려 얼치기로 다른 포스팅 얼른 올리공~~ㅋㅋㅋ
이슬(qtip54) 98.xx.xx.220 | 03/31/2015 10:37
촌장님이 어머니를 쏙 빼 닮으신것 같습니다.
훗날
자손들이 촌장님을 기억하게 될 것은
1)꼿꼿한 성깔 ㅋㅋ
2)타의추종을 불허하는 글
3)청국장 맛 솜씨
4)자연을 사랑한 것
4)엄청 부지런한 블로거 ㅎㅎ
좀더 생각 해보고
리스트를 늘리도록 해보지요 ^^*
촌장(kubell) 104.xx.xx.13 | 04/03/2015 23:41 |
리스트가 더 늘어나기만 기다리느라
며칠 컴에 뜸했었네요
실은 성주간이라 묵언정진 혹은 침묵피정을 좀....
그 덕에 시력도 향상되고 시간도 벌고요 ㅎㅎ
자연을 아끼며 산 것과 청국장 솜씨는 인정해줄거예요
그러나 꼬장한 승질머리에는 고개 내젓겠지요? ㅎ